독립협회의 창립과 대한제국의 수립 -충돌과 화합의 공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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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독립협회의 창립과 대한제국의 수립 -충돌과 화합의 공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독립협회의 창립
1) 독립협회의 시기구분
2) 독립협회를 구성하는 세력
3) 독립협회의 창립목적
4) 창립의 정치적 배경
5) 설립취지홍보문과 독립협회규칙
3. 대한제국의 수립
1) 아관파천의 주도세력
2) 새로운 내각의 구성과 갈등
3) 칭제(稱帝)의 추진
4) 광무정권의 성립
4. 나가며
5. 참고문헌

본문내용

된 문제인 만큼 고종이나 그 측근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중망(衆望) 있는 대신들이 국민여론으로 요청하는 형식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대신들의 상소문이 줄을 잇자, 고종은 10월 3일 이를 재가하고 10월 12일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열강 중에서는 일본이 제일 먼저 황제 칭호를 사용하여 고종의 환심을 사고, 나머지 열강들도 일본의 뒤를 이어 칭제를 인정하였다. 칭제는 오랜 기간 조선을 지배해 오던 중국 중심의 국제관계에서 탈피하여 세계 각국을 상대로 한 만국공법적 질서에 편입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4) 광무정권의 성립
독립협회 운동을 제압한 고종은 마지막 남은 반정부 세력으로서 재일망명자들의 동향을 경계하면서 더욱 황제권의 보위에 주력하고 있었다. 반정부운동에 대해서는 서영희, 위의 책, pp47-54 참조.
고종은 독립협회 해산 이후 일단 독립협회 진압에 공로가 큰 보수파 대신들과 측근세력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하였다. 특히 보부상을 조직화한 황국협회를 이끌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세력을 물리적으로 진압한 조병직, 민종묵, 홍종우, 이기동, 길영수 등이 정권의 실세로 등장하였다.
고종은 1899년 3월 21일 조칙을 내려 대규모의 인원을 면직시키거나 유배를 보낸다. 이 사건은 정부대신에게 황제권의 우위를 드러내는 효과를 거두었다고 볼 수 있다.
1899년 4월 신기선 내각이 들어서면서 정국은 더욱 보수적인 분위기가 된다. 신기선은 연좌율 부활을 시작으로 구법을 모두 복구하려고 시도하는 한편, 중추원 의관들을 자신의 심복들로 채워 정권을 독단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연좌율에 대해 많은 정부대신들이 반대를 하였고, 급기야 폭탄투척사건이 벌어져 연좌율 부활 칙령은 취소되었다.
이 사건 이외에 몇 차례의 정치적 사건을 거치면서 보수파 대신들이 점차 실세하고, 보수파들의 공격으로 일부 개명관료들도 내각을 떠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부협판 겸 경무사 김영준을 비롯하여 탁지부협판 주석면, 법부협판 이근호, 농상공부협판 민영식, 원수부 총장 이학균, 궁내부 귀족원경 민영선 등 소위 ‘제2류의 인물’이라고 일컬어지는 협판급 소장관료들이 정계에 부상하였다.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들에 대하여 정부 대관들이 보수파와 진보파로 나뉘어 권력쟁탈전을 벌이는 동안, 관료체제 내에서는 하위이지만 황제의 총애로 실권을 장악한 인물들이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1900년 의화단 사건 청조(淸朝) 말기인 1900년 중국 화베이[華北] 일대에서 일어난 배외적(排外的) 농민투쟁.
을 계기로 열강이 청에 공동 출병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고종은 그 여파가 한반도에도 미칠까봐 우려하면서, 특히 일본측 동향에 대해 극히 경계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 때 마침 일본에서 재일망명자들이 귀국하게 되자 고종은 이들을 처형하는데, 이는 고종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최근의 연구는 고종이 국내적으로 더욱 황제권의 보위를 강화함으로써 혹시 있을지 모를 망명 개화파들의 쿠데타 시도에 대처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았다. 이는 곧 근왕파들의 권력 핵심부 장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황제를 구심점으로 민권운동에 반대하는 여러 정치세력이 결집된 양상을 띠는 광무정권의 내부에는 황제권과의 관계, 사상적 기반, 조선왕조적인 구질서와의 계승성, 앞으로 나아갈 지향성 등의 문제에 있어서 다양한 편차를 보이는 여러 이질적 집단들이 혼재해 있었으므로 광무정권의 앞날이 결코 순탄하게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4. 나가며
이상과 같이 독립협회의 창립과 대한제국의 수립에 대해 살펴보았다. 독립협회의 창립 부분에서는 독립협회의 시기를 4시기 또는 2시기 구분한 연구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다음으로 독립협회를 구성하는 세력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정동구락부’라고 불리는 정동파에 대해 자세히 보았다. 독립협회의 창립 목적과 창립의 정치적 배경에 대해서도 기존의 연구들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그리고 독립협회규칙을 통해 독립협회의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대한제국에서는 우선 아관파천이라는 사건을 주도한 세력(근왕파)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는 앞선 독립협회 때 나왔던 주도세력과 다른 모습이었다.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한 고종이 새로운 내각을 수립하면서 근왕파를 기용하는데, 이 근왕파와 정부대신들 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나타난다. 고종은 아관파천이 있은 지 1년이 지나, 경운궁으로 간다. 그리고 어지러운 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강화를 위하여 칭제를 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서히 국가를 장악하려고 시도한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민족국가라는 같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갔다. 두 집단 모두 초기에는 서로를 위하여 행동하였고, 이것이 곧 군주권 강화로 나타났다. 왕실은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 왕태자를 통하여 1,000을 납부하면서 협회설립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독립협회를 관변단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칭제 당시 독립협회는 “황제 位號로써 국권을 높이자”라는 논설을 발표하였고, <헌의 6조>에서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을 주장했음을 근거로 독립협회 역시 황제권 강화를 주장하였다. 서영희, 위의 책, p47.
그러나 토론회를 개최하고 민중들의 참여가 더해지면서 독립협회의 성격이 바뀌었다. 즉 소위 고급관료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민중들이 채우면서 반정부 인식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결국 독립협회는 이를 알아챈 고종에 의해 해산하게 된다.
독립협회와 대한제국의 충돌과 화합을 발판삼아 이 시기의 대한제국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5. 참고문헌
-서영희, 『대한제국정치사연구』,서울대출판부, 2003.
-신용하, 『독립협회연구』,일조각, 1976.
-주진오, 「독립협회의 주도세력과 참가계층」,『동방학지』77,78,79합집, 1993.
-주진오, 1995, 「19세기 후반 개화개혁론의 구조와 전개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 연세 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주진오, 「대한제국과 독립협회」,『한국역사입문 3』, 풀빛, 1995.
-한철호, 『친미개화파연구』, 국학자료원, 1998.
-한흥수, 「독립협회의 조직과 운영」『한국사』41,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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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4.10
  • 저작시기20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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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38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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