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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들어가며...
한미투자협정 사례분석
I. 갈등인식
[1] 한국의 상황과 한미투자협정
1) 한국의 상황(1997年)
2) 한미투자협정이란?
3) 추진배경
4) 예상효과(외국인 투자의 경제적 효과)
5) 주요 내용
6)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득과 실
得
失
※표면적 협상구도
- 한국 vs 미국
II. 협상을 위한 준비
III. 사전협상을 위한 활동협상을 위한 활동
IV. 본 협 상
[1] 1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1998. 7. 21. 워싱턴)
1) 실무협상 내용
2) 이후의 국내외 정세(스크린쿼터 문제 대두)
3)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1차 협상이후 가시화된 협상구도
[2] 2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1998. 10. 26~27. 서울)
1) 실무협상 내용
[3] 3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1998. 11. 17~18. 워싱턴)
1) 실무협상 내용
2) 이후의 국내외 정세
3)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4] 4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예정 (1998. 12. 16~17.)
1) 취소 이유
2)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5] 1차 비공식 실무협의 (1999. 1. 25. 워싱턴)
1) 실무협의 내용
2) 이후 국내외 정세
3)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6] 2차 비공식 실무협의 (1999. 4. 27~28. 워싱턴)
1) 실무협의 내용
2)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7] 잠복기 : 2000년이후 ~ 현재(지속적 협상타결 모색)
1)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한미투자협정이 결렬될수밖에없는 이유
I. 각 국의 국내정치 상황
[1] 한 국
1) 스크린쿼터에 대한 행정부내 부처간 갈등
2) 1998~1999년의 구체적 갈등 전개 과정
3) 기타 부처의 입장
4) 문광부와 외교통상부간 갈등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
[2] 미 국
1) 왜 미국정부는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그렇게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는가?
[3] 한국영화산업의 정치적 힘
1)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2) 영화우대 정책의 제도적 지속성
3) 국제법·국내법적으로 적법한 스크린쿼터 제도
4) 감정에 호소하는 문화애국주의 전략
5) 폭넓은 외부연대 구축
결론 및 협상타결 제안점
협상사례분석을 통한A조의 교훈
I. 갈등상황인식과 사전협상의 중요성
II. PR의 힘
III. Public은 선진국민, 정치인은 후진국민
IV. 협상이해 당사자에 대한 이해
V. 유기적이지 못한 우리나라 정부의 구조
VI. 중요시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전달
VII. 시민단체로의 재도약 ‘스크린문화연대’
< 참 고 자 료 >
한미투자협정 사례분석
I. 갈등인식
[1] 한국의 상황과 한미투자협정
1) 한국의 상황(1997年)
2) 한미투자협정이란?
3) 추진배경
4) 예상효과(외국인 투자의 경제적 효과)
5) 주요 내용
6) 일반적으로 예상되는 득과 실
得
失
※표면적 협상구도
- 한국 vs 미국
II. 협상을 위한 준비
III. 사전협상을 위한 활동협상을 위한 활동
IV. 본 협 상
[1] 1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1998. 7. 21. 워싱턴)
1) 실무협상 내용
2) 이후의 국내외 정세(스크린쿼터 문제 대두)
3)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1차 협상이후 가시화된 협상구도
[2] 2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1998. 10. 26~27. 서울)
1) 실무협상 내용
[3] 3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1998. 11. 17~18. 워싱턴)
1) 실무협상 내용
2) 이후의 국내외 정세
3)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4] 4차 한미투자협정실무협상 예정 (1998. 12. 16~17.)
1) 취소 이유
2)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5] 1차 비공식 실무협의 (1999. 1. 25. 워싱턴)
1) 실무협의 내용
2) 이후 국내외 정세
3)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6] 2차 비공식 실무협의 (1999. 4. 27~28. 워싱턴)
1) 실무협의 내용
2)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7] 잠복기 : 2000년이후 ~ 현재(지속적 협상타결 모색)
1)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투쟁일지
한미투자협정이 결렬될수밖에없는 이유
I. 각 국의 국내정치 상황
[1] 한 국
1) 스크린쿼터에 대한 행정부내 부처간 갈등
2) 1998~1999년의 구체적 갈등 전개 과정
3) 기타 부처의 입장
4) 문광부와 외교통상부간 갈등상황에 대한 우리의 생각
[2] 미 국
1) 왜 미국정부는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그렇게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는가?
[3] 한국영화산업의 정치적 힘
1)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2) 영화우대 정책의 제도적 지속성
3) 국제법·국내법적으로 적법한 스크린쿼터 제도
4) 감정에 호소하는 문화애국주의 전략
5) 폭넓은 외부연대 구축
결론 및 협상타결 제안점
협상사례분석을 통한A조의 교훈
I. 갈등상황인식과 사전협상의 중요성
II. PR의 힘
III. Public은 선진국민, 정치인은 후진국민
IV. 협상이해 당사자에 대한 이해
V. 유기적이지 못한 우리나라 정부의 구조
VI. 중요시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전달
VII. 시민단체로의 재도약 ‘스크린문화연대’
< 참 고 자 료 >
본문내용
지 않았다는 것 또한 큰요인이다. 특히 외교통상부를 관장하는 국회의 통일외교통상상임위원회의 현행유지결의안 통과는 외교통상부의 행보에 결정을 짓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갈등이 진행되는 동안 외교통상부는 폐지에서 축소로, 스크린쿼터를 협정에서 제외시키는 별도협상론 등의 대안을 제시하여 관철시키고자 하였으나 전자는 국내에서의 완강한 반대로, 후자는 미국측의 거절로 실패하고 말았다.
미 국
1) 왜 미국정부는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그렇게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는가?
사실 미국측이 한국 영화시장의 개방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미 통상마찰이 격화되던 80년대 중반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는 한국의 외화수입쿼터가 불공정 교역행위라며 USTR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1985년 제1차 한미 영화협상이 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화수입쿼터가 폐지되고 외화직배가 허용되었다. 다만 스크린쿼터는 미국측의 양해하에 존속되었다. 3년 뒤 MPEAA는 미국영화의 한국시장내 영업활동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제도와 시책들이 ‘사실상의 쿼터제’라고 주장하며 당시 새로 제정된 1988년도 종합무역법의 수퍼 301조에 의한 조사를 USTR에 다시 청원하였다. 결국 제2차 한미 영화협상이 시작되었고 외국영화 수입(복사) 필름 벌수의 제한이 단계적으로 철폐되었다. 그 이후 USTR은 연례 무역장벽보고서를 발간할 때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제가 영화시장의 자유경쟁을 제한하고 있다고 계속 지적해오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영화산업의 해외진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배경으로서 일단 미국 경제에서 문화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최대의 수출품은 바로 미국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미국 정부의 1997년도 산업별 국내총생산(GDP) 통계자료에 의하면 영화, 오락, 방송, 이 세 산업의 합계가 무려 1,503억 달러나 된다. 이 수치는 전자·전기기기 제조업의 1,573억 달러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또한 미국의 핵심 지적소유권사업(영화, TV, 비디오, 음악, 컴퓨터 소프트웨어 포함)의 1997년도 해외시장 매출액 및 수출액은 668억 5천만 달러였다. 이것은 화학산업의 664억 달러, 자동차 산업의 583억 4천만 달러, 농업의 573억 달러를 누른 전 산업의 최고였다. 빌 아이비 미 국립예술기금(NEA) 회장이 “문화예술은 이제 그 자체가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었다고 말한 것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한편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 영화산업의 수익구조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미국 영화산업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제작비용의 급상승이었다. 1990년에 2,680만 달러였
던 영화 한 편당 평균제작비용이 1997년에는 두 배가 넘는 5,340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미국내 흥행수입의 증가는 이에 크게 못미치는 완만한 수준이다. 오히려 영화 한 편당 수입은 1995년의 1,336만 달러에서 1997년에는 1,248만 달러로 감소했다. 편당 평균 흥행수입에서 제작 및 배급비용의 합계를 뺀 단순수지를 보면 미국 영화산업은 한마디로 손해보는 장사였다. 1990년의 경우 영화 한편의 제작·배급 총비용은 약 3,850만 달러인 반면 흥행수입은 1,200만 달러로 약 2,65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1997년에는 6,320만 달러, 1998년에는 6,440만 달러로 적자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영화계의 탈출구의 하나가 바로 해외시장의 확대였다. 1990년대 이후 미국 영화계 전체 수입에서 해외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져 가는 추세이다. 예를 들어 1993년에 개봉되었던 ‘쥬라기 공원’의 경우 미국내 흥행수입이 3억 5,700만 달러였음에 비해 해외시장에서는 5억 5,9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98년에 공개된 ‘타이타닉’의 경우 해외시장에서의 수입만 무려 35억 달러가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스크린쿼터 존폐 논란이 한창이던 1999년 3월 방한했던 윌리엄 데일리 상무장관은 “미국의 영화산업은 대표적인 수출산업의 하나”이며 스크린쿼터는 미국영화의 한국진출을 제약하고 공정한 시장경쟁을 가로막고 있다며 그 폐지를 요청했다. 그와 함께 방한하여 스크린쿼터 철폐를 적극 요구했던 MPAA의 잭 발렌티 회장은 이미 1993년 3월의 한 영화관계자 모임에서 “만약 해외시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망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미국측이 협상과정에서 스크린쿼터 축소·철폐를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국 영화산업으로서는 해외시장의 확대가 자신들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특히 최근 아시아 영화시장의 급성장을 감안할 때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주한 미상공회의소가 1999년 7월 스크린쿼터 문제를 투자협정과 분리하여 별도로 협상할 것을 MPAA에 요청하기도 했으나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한국측이 미처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이처럼 한미 투자협정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의 최대 양보점은 작았던 것이다.
한국영화산업의 정치적 힘
스크린쿼터 축소·폐지안에 대한 한국 영화계의 거센 저항이 한미 투자협정을 교착상태에 빠트린 주원인이라는 설명은 곧 보다 중요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즉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대통령이 직접 추진했던 투자협정 협상이 어떻게 하나의 산업계가 반발한다고 해서 좌초되어 버렸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실 8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던 제 1,2차 한미 영화협상의 경우, 당시 영화계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외화직배가 허용되는 등 한국 영화시장이 대폭 자유화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영화협상 하나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던 영화계가 지금은 어떻게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투자협정 협상을 멈춰 서게 하였는가?
1)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일차적으로 가능한 설명은 일단 한국사회의 정치적 맥락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과거 군사정권 시절 권위주의적이었던 정치체제가 90년대를 지나면서 급속히 민주화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은 곧 국가 정책결정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증
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80년대의 한미 영화협상
미 국
1) 왜 미국정부는 한국의 스크린쿼터제를 그렇게 집중적으로 문제삼았는가?
사실 미국측이 한국 영화시장의 개방을 요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한미 통상마찰이 격화되던 80년대 중반 미국영화수출협회(MPEAA)는 한국의 외화수입쿼터가 불공정 교역행위라며 USTR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리하여 1985년 제1차 한미 영화협상이 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외화수입쿼터가 폐지되고 외화직배가 허용되었다. 다만 스크린쿼터는 미국측의 양해하에 존속되었다. 3년 뒤 MPEAA는 미국영화의 한국시장내 영업활동에 장애가 되는 각종 제도와 시책들이 ‘사실상의 쿼터제’라고 주장하며 당시 새로 제정된 1988년도 종합무역법의 수퍼 301조에 의한 조사를 USTR에 다시 청원하였다. 결국 제2차 한미 영화협상이 시작되었고 외국영화 수입(복사) 필름 벌수의 제한이 단계적으로 철폐되었다. 그 이후 USTR은 연례 무역장벽보고서를 발간할 때마다 한국의 스크린쿼터제가 영화시장의 자유경쟁을 제한하고 있다고 계속 지적해오고 있다.
미국이 이처럼 영화산업의 해외진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배경으로서 일단 미국 경제에서 문화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다. 오늘날 미국 최대의 수출품은 바로 미국 대중문화의 산물이다. 미국 정부의 1997년도 산업별 국내총생산(GDP) 통계자료에 의하면 영화, 오락, 방송, 이 세 산업의 합계가 무려 1,503억 달러나 된다. 이 수치는 전자·전기기기 제조업의 1,573억 달러와 거의 같은 수준이다. 또한 미국의 핵심 지적소유권사업(영화, TV, 비디오, 음악, 컴퓨터 소프트웨어 포함)의 1997년도 해외시장 매출액 및 수출액은 668억 5천만 달러였다. 이것은 화학산업의 664억 달러, 자동차 산업의 583억 4천만 달러, 농업의 573억 달러를 누른 전 산업의 최고였다. 빌 아이비 미 국립예술기금(NEA) 회장이 “문화예술은 이제 그 자체가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었다고 말한 것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한편 보다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 영화산업의 수익구조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미국 영화산업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제작비용의 급상승이었다. 1990년에 2,680만 달러였
던 영화 한 편당 평균제작비용이 1997년에는 두 배가 넘는 5,340만 달러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미국내 흥행수입의 증가는 이에 크게 못미치는 완만한 수준이다. 오히려 영화 한 편당 수입은 1995년의 1,336만 달러에서 1997년에는 1,248만 달러로 감소했다. 편당 평균 흥행수입에서 제작 및 배급비용의 합계를 뺀 단순수지를 보면 미국 영화산업은 한마디로 손해보는 장사였다. 1990년의 경우 영화 한편의 제작·배급 총비용은 약 3,850만 달러인 반면 흥행수입은 1,200만 달러로 약 2,650만 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는데, 1997년에는 6,320만 달러, 1998년에는 6,440만 달러로 적자규모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영화계의 탈출구의 하나가 바로 해외시장의 확대였다. 1990년대 이후 미국 영화계 전체 수입에서 해외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져 가는 추세이다. 예를 들어 1993년에 개봉되었던 ‘쥬라기 공원’의 경우 미국내 흥행수입이 3억 5,700만 달러였음에 비해 해외시장에서는 5억 5,9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1998년에 공개된 ‘타이타닉’의 경우 해외시장에서의 수입만 무려 35억 달러가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스크린쿼터 존폐 논란이 한창이던 1999년 3월 방한했던 윌리엄 데일리 상무장관은 “미국의 영화산업은 대표적인 수출산업의 하나”이며 스크린쿼터는 미국영화의 한국진출을 제약하고 공정한 시장경쟁을 가로막고 있다며 그 폐지를 요청했다. 그와 함께 방한하여 스크린쿼터 철폐를 적극 요구했던 MPAA의 잭 발렌티 회장은 이미 1993년 3월의 한 영화관계자 모임에서 “만약 해외시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망했을 것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미국측이 협상과정에서 스크린쿼터 축소·철폐를 그토록 끈질기게 요구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국 영화산업으로서는 해외시장의 확대가 자신들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특히 최근 아시아 영화시장의 급성장을 감안할 때 한국의 스크린쿼터 제도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주한 미상공회의소가 1999년 7월 스크린쿼터 문제를 투자협정과 분리하여 별도로 협상할 것을 MPAA에 요청하기도 했으나 단호하게 거부되었다. 한국측이 미처 감지하지는 못했지만 이처럼 한미 투자협정 협상 테이블에서 미국의 최대 양보점은 작았던 것이다.
한국영화산업의 정치적 힘
스크린쿼터 축소·폐지안에 대한 한국 영화계의 거센 저항이 한미 투자협정을 교착상태에 빠트린 주원인이라는 설명은 곧 보다 중요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즉 국가적 위기상황 속에서 대통령이 직접 추진했던 투자협정 협상이 어떻게 하나의 산업계가 반발한다고 해서 좌초되어 버렸는가 하는 의문이다. 사실 8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던 제 1,2차 한미 영화협상의 경우, 당시 영화계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외화직배가 허용되는 등 한국 영화시장이 대폭 자유화되었다. 그렇다면 당시 영화협상 하나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던 영화계가 지금은 어떻게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투자협정 협상을 멈춰 서게 하였는가?
1)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민주화
일차적으로 가능한 설명은 일단 한국사회의 정치적 맥락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과거 군사정권 시절 권위주의적이었던 정치체제가 90년대를 지나면서 급속히 민주화되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은 곧 국가 정책결정과정에서 시민사회의 정치적 영향력이 크게 증
대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80년대의 한미 영화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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