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없음.
본문내용
28일 도착하였고 3주 동안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했다. 2월 17일 마침내 이 논쟁은 해결되었다.
그 날 루터가 극도로 지쳐 있어 쉬고 있는 동안 아들들이 아버지를 침대로 모셔갔고 그 옆에서 간호하였는데 루터는 심장 부근의 통증을 호소하였다. 새벽 2시쯤 또다시 심장 부근의 고통을 호소하였다. 고통이 계속 되자 의사가 급히 달려왔지만 그 의사는 루터가 죽음이 임박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루터는 정신이 극도로 혼미한 사태에서도 성서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반복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그는 죽음이 결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편 69:20절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편 31:5절을 암기하였다. “주의 손에 나의 영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나를 속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루터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마침내 그의 동료 교수인 요나스(Jonas)가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존경하는 목사님 당신은 당신이 설교했던 교리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루터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라고 대답했다.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부터 불과 200m도 안 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 때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2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루터가 임종할 때 증인들은 열 네 명이었다.
장례 미사는 2월 19일 2시에 루터가 죽었던 집 건너편에 있던 성 앤드루(St. Andrew) 교회에서 열렸다. 이 교회는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교회였고, 그가 태어났던 곳으로부터 불과 몇 블록도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친구 요나스 교수가 감동적인 장례 설교를 했다. 삭소니 주 제후와 비텐베르크 교수들은 루터의 시신을 비텐베르크로 이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2월 22일 월요일에 루터의 시신은 마침내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루터는 성채 성당교회(Castle Church)에 장례되었다. 루터의 관은 교회당 북쪽 문 즉 루터가 95개조 테제를 게재했던 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운구는 교회당 남쪽 설교단 근처에 놓였다. 장례식 설교는 데살로니가전서 4:13-14를 본문으로 부겐하겐 그는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갱신을 위해 이룩하였던 업적들을 찬양하였다. 그는 루터의 용기, 그의 예리한 지성, 그리고 그의 독특한 웅변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박해 받은 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었고, 예언자들의 동료로서 인사를 받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했고, 멜란히톤이 조사 멜란히톤은 루터를 예언자들 가운데 포함시킴으로써 그의 중요성을 명쾌하게 묘사하였다. 루터는 신학자, 언어의 창조자, 예술가, 영우 그리고 탁월한 설교가요 목사였다. 게다가 그를 예언자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를 했다.
마르틴 루터
그의 나이 63세를 넘길 무렵 1546년 세상을 떠나다
때는 2월 18일 새벽 2-3시경
같은 달 22일에 비텐베르크에 묻히다
그는 죽었지만 그는 살아있다.
9. 참고 문헌
「세계교회사 Ⅱ」 이형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루터 연구 입문」베른하르트 로제,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학 이야기」 김주한, 대한기독교 서회, 2002
「마르틴 루터 그 인간과 그의 업적」 W.뢰베니히, 박호용 옮김, 성지출판사, 2002
「소설 마르틴 루터」Grant. Reg, 홍성사, 2004
「종교 개혁사」, 김홍기. 지와 사랑, 2004
그 날 루터가 극도로 지쳐 있어 쉬고 있는 동안 아들들이 아버지를 침대로 모셔갔고 그 옆에서 간호하였는데 루터는 심장 부근의 통증을 호소하였다. 새벽 2시쯤 또다시 심장 부근의 고통을 호소하였다. 고통이 계속 되자 의사가 급히 달려왔지만 그 의사는 루터가 죽음이 임박했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루터는 정신이 극도로 혼미한 사태에서도 성서 구절들을 암송하면서 반복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의탁하였다. 그는 죽음이 결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시편 69:20절의 말씀을 확고하게 붙들고 있었다.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여 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시편 31:5절을 암기하였다. “주의 손에 나의 영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주님, 나를 속량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루터는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마침내 그의 동료 교수인 요나스(Jonas)가 절규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존경하는 목사님 당신은 당신이 설교했던 교리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겠습니까?” 루터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 짜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예”라고 대답했다. 루터는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부터 불과 200m도 안 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그 때는 1546년 2월 18일 새벽 2시가 넘는 시각이었다. 루터가 임종할 때 증인들은 열 네 명이었다.
장례 미사는 2월 19일 2시에 루터가 죽었던 집 건너편에 있던 성 앤드루(St. Andrew) 교회에서 열렸다. 이 교회는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교회였고, 그가 태어났던 곳으로부터 불과 몇 블록도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친구 요나스 교수가 감동적인 장례 설교를 했다. 삭소니 주 제후와 비텐베르크 교수들은 루터의 시신을 비텐베르크로 이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2월 22일 월요일에 루터의 시신은 마침내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루터는 성채 성당교회(Castle Church)에 장례되었다. 루터의 관은 교회당 북쪽 문 즉 루터가 95개조 테제를 게재했던 문을 통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운구는 교회당 남쪽 설교단 근처에 놓였다. 장례식 설교는 데살로니가전서 4:13-14를 본문으로 부겐하겐 그는 루터가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갱신을 위해 이룩하였던 업적들을 찬양하였다. 그는 루터의 용기, 그의 예리한 지성, 그리고 그의 독특한 웅변을 강조하였다. 루터는 박해 받은 자들의 무리 가운데 있었고, 예언자들의 동료로서 인사를 받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였다.
이 했고, 멜란히톤이 조사 멜란히톤은 루터를 예언자들 가운데 포함시킴으로써 그의 중요성을 명쾌하게 묘사하였다. 루터는 신학자, 언어의 창조자, 예술가, 영우 그리고 탁월한 설교가요 목사였다. 게다가 그를 예언자라고 표현해도 지나치지 않다. 라고 이야기하였다.
를 했다.
마르틴 루터
그의 나이 63세를 넘길 무렵 1546년 세상을 떠나다
때는 2월 18일 새벽 2-3시경
같은 달 22일에 비텐베르크에 묻히다
그는 죽었지만 그는 살아있다.
9. 참고 문헌
「세계교회사 Ⅱ」 이형기,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루터 연구 입문」베른하르트 로제,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3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학 이야기」 김주한, 대한기독교 서회, 2002
「마르틴 루터 그 인간과 그의 업적」 W.뢰베니히, 박호용 옮김, 성지출판사, 2002
「소설 마르틴 루터」Grant. Reg, 홍성사, 2004
「종교 개혁사」, 김홍기. 지와 사랑,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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