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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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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한민족(우리민족, 한국민족)의 역사

Ⅲ. 한민족(우리민족, 한국민족)의 특성

Ⅳ. 한민족(우리민족, 한국민족)의 정체성

Ⅴ. 한민족(우리민족, 한국민족)의 문화

Ⅵ. 한민족(우리민족, 한국민족)의 생활

Ⅶ. 한민족(우리민족, 한국민족)의 이주

참고문헌

본문내용

계획을 실현시킬 여건이 제대로 갖추지 않아서 실패로 돌아가기는 하였지만 이 사건은 소련당국이 한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태도를 아주 잘 드러내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에 몇 년 지나지 않아서 1926년 전연방소비에트집행위원회 간부회는 한인들에 대하여 강제이주의 기본적인 원칙을 마련하였다. 그 요체는 연해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을 북위 48도 5의 이북 지역인 하바로프스크 및 블라고베셴스크지역으로 이주시키고 한인들을 이주시킨 후 남는 땅은 러시아 이민들로 채운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구체적인 정책으로 집행되어서 1928-29년에 1297명, 1930년에 1625명의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이주 및 정착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음은 물론이다. 1931년 한인이주계획은 일단 중단되는데 이는 아마도 정치적인 고려에서였을 것이다.
1937년 강제이주의 원인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논란이 있으나 왜 이 강제이주정책이 시행되었는가에 대하여 보다 분명한 연구가 실증적인 자료를 통하여 검증되어야 한다. 먼저 1937년 강제이주의 원인은 첫째로는 러시아-소련정부의 일관된 정책, 즉 한인들을 한-러국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주시키려는 한인고립화정책의 일환이었음은 문명하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는 비교적 소수이기는 하지만 연구가 진행되어있다.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공산당이 집권한 소련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인들은 늘 안보상의 이유로 인하여 한인들이 한국과의 국경근처에 거주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왔다. 일시적인 완화책과 강경책이 시기에 따라 달리 집행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한인의 노동력 활용이라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러시아의 국경확보라는 정치 안보적 목적이 우선적으로 고려될 때 한인들은 언제나 추방의 위협을 받았다. 한인들을 극동지역 특히 국경근처에서 추방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반복이 되었던 바 이는 러시아 시절이나 소련시절이나 조금도 다름이 없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길게 보아 한인들의 주거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상존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37년의 독특한 국제정치적 환경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난다. 이는 극동에서 심각한 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소련은 극동에서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을 받을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미 1929-30년에도 일본과 소련은 국경충돌을 경험한 바가 있고 중국과 일본의 전면전은 소련으로서는 상당한 안보상의 위협이 되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극동지방에서의 한인들의 존재를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인들은 당시 국가를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신민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적국과 내통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협세력이 자국의 국경 내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다고 생각될 수 있다. 또한 일본으로서는 연해주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자국의 정책수행에 우호적일 것이라고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연해주지역은 강한 반일감정을 가진 한인주민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연해주에 근거를 둔 독립운동 단체들이 활약하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여 볼 때 일본으로서는 연해주 일대에 한인들이 거주하는 것이 자국의 제국주의정책수행에 그리 바람직하다고 느끼기 어려웠을 것이다. 바로 소련과 일본의 이와 같은 입장은 연해주 한인들이 극동으로부터 추방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게 하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는 극동의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추방함에 있어서 소련과 일본 당국 사이의 일종의 이해관계의 일치에 입각한 묵계 내지는 밀약이 성립할 수 있지 않았겠는가 하는 가능성을 던져주는 것이다. 소련에서 일시에 대거 한인들을 추방함에 있어 민감해야 할 일본도 당시에 이에 대하여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는 점도 이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여하튼 아직까지 뚜렷한 증거는 없다. 그러나 일본과 소련의 외교적인 입장을 면밀히 분석하고 관련문헌을 분석한다면 이러한 방면에서의 단서를 찾아낼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참고문헌
강정덕(2006), 한민족의 특성을 고려한 한반도 통일방안, 한양대학교
김영재 외 2명(2008), 중국의 혼례문화 : 한민족생활조사, 국립민속박물관
육군사관학교(1981), 한민족의 역사, 일조각
유병용(2002), 한민족의 해외이주와 민족교육 문제, 한국현대사연구회
정달영(2003), 인문학 활성화와 한민족문화학회의 역할, 한민족문화학회
최우길(2005), 지구화 시대의 한민족 정체성 모색, 한국평화연구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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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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