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 믿음이 깊었던 외부인(外部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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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야나기 무네요시, 믿음이 깊었던 외부인(外部人)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야나기 무네요시의 공예, 그 시작
 2. 야나기, 그 공예의 길
 3.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각한 작은 협동체, 길드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중을 방지하고 권력의 분산에 유의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고, 길드 사회주의 안에서의 ‘인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째,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존재, 사회를 변화시킬 의지를 가진 존재, 심지어 거대한 조직 사회 안에서도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하지 않는 존재이고,
둘째, 인간의 개성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고 물질적인 측면을 넘어선 정신적 측면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S. G. Hobson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가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서 상상력, 믿음, 정신 등에 존재, 도덕적 만족, 예술적 창조와 같은 것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노동의 영역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것도 결국 노동의 미학에 대한 관심을 놓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화적 목적을 지닌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상에 대한 기대를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길드사회주의라고 할 수 있다.
길드사회주의자들은 사회의 변화가 철저히 아래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따라서 엘리트의 역할에 대해 적극적인 자리를 마련해 두지 않았다. 다원주의를 바탕에 깐 길드 사회주의에서는 산업 통제의 주체는 산업의 바깥에 있는 어떤 사람이나 집단이 될 수가 없고, 노동자를 포함한 산업의 구성원들이 되어야 했다. 이는 곧 경제적 민주주의의 실현을 뜻했고, ‘민족’보단 ‘민주’를 우선했다는 그 성격의 이해에 충분한 도움이 된다.
다만, 그러한 이상적인 조직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소규모 조직간의 마찰은 과연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가 핵심적인 난제(難題)였으며, 또한 생산자 본위의 길드 사회주의 내에서 예상되는 소비자의 저항은 또 어떻게 해결해야 했는지 등이 길드 사회주의의의 퇴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이었다고 논의되고 있다. 노자(老子)는 이에 대해, 왕래하지 않음을 제시했으나, 야나기는 그저 이상적인 이론을 확립하는 데에 주력했던 듯하다.
페이비언 사회주의에서는, 자유에 대해,
“What is Liberty? Leisure.” 라는 유명한 문구를 제시한다. 김명환, 경제적 민주주의를 지향한 두 자유 사회주의, 영국사학회 영국연구, 1998. 149-155쪽.
노동에서 해방된 ‘시간’이라는 자유를 통해 자아의 실현, 사회적 교제, 오락, 예술 추구 가능하게 되어 개인의 능력 발전의 동기가 되고, 이는 곧 재화획득 능력과 필연적 관계를 지니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자유는 노동의 자유가 아니라, 여가의 자유, 산업의 자유가 아니라 산업 밖에서의 자유를 의미했다.
이에 비해 길드사회주의자들은, 인간 주체적 삶의 조건 확보를 급선무로 하여, 조직된 곳, 노동하는 곳, 산업에서의 자유를 제시했고, 노동자들이 직접 작업통제과정과 산업통제과정에 참여해야 하며, 이것이 결국 경제적 평등 실현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이러한 부분은 분명 야나기가 제시한 공예의 길과 맞닿은 부분이 있으나, 앞서 설명한 차이점으로 인해 그 의미가 퇴화된 부분이기도 하다.
Ⅲ.결론
UNESO 중요 문화재로 전세계적으로 지정받은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보호받고 있는 것을 보면 늘, 다행이다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을 품곤 했다. 그나마 우리 곁에 있는 몇몇의 그것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발걸음을 내딛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그리 잔인해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얼마 전 접하게 된 야나기 무네요시전(展)에서 본 많은 공예품들을 만났을 때엔, 이렇게 보존되고 간직되는 좋은 면 아래 이것이 진정 야나기가 말한 공예의 ‘미’인가라는 의구심이 저절로 들었다. 야나기에게 있어 공예의 원칙 제1조건이 바로 쓰임(用)이었던 것을 더듬어보면, 공예품은 비록 닳아 없어질지라도, 어디까지나 민중 속에서 쓰여지고 민중 속에서 품어져야 할 것들이 아니었던가. 아무리 미학(美學)의 범주에서 실로 위대한 업적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끼쳤다 하더라도, 야나기가 ‘민예’로 이름붙인 순간부터 이미 그것들은 ‘민예’가 아닌, 전시품, 수집품, 소장품이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야나기가 생각한 ‘예술’, ‘민예’, \'미’는 무엇이었을까? 애석하게도 필자는 그 의미를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가 남긴 여러 저작과 활동의 면모를 통해 바라본 결과, 그는 비록 일본의 독특한 미, 조선의 ‘미’를 찾아냈을지언정, 자신이 잠정한 ‘미’의 세계에 종속되어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개념 속에 좌지우지되어 여러 모순점을 만들어내고 만 외부인(外部人)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조선에 수 차례 방문을 통해 아무리 우리의 공예품들을 접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실제로 공예품을 만들거나, 사용해 보기보다는 이미 ‘공예품’으로 이름 붙여서 애지중지하며 다루었음이 자연스러운 흔적을 남겼다. 공예품에서 대단한 어떤 ‘미’를 발견한 후, 그는 서양에 대적할 동양의 무언가를 지키고 싶었던 것인지, 아니면 더욱 발전시키고 싶었던 것인지를 정확히 말할 수는 없겠으나, 영국에서 발전한 ‘길드’의 개념을 변용시켜 자신의 사상에 여러 가지 마찰되는 부분을 감수하면서도 그 운동을 전개해나갔다.
막사발에서 ‘미’를 발견한 야나기가 과연 막사발을 민중이 실제로 쓰는 마음가짐으로 써본 적이 있을까? 야나기에게 있어 ‘민예’가 된 것이 민중에게도 ‘민예’일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렇게 그가 말한 ‘비애의 미’이며, ‘건강의 미’라는 것이 한국 미학계에서 회자되는 것이 세기가 바뀌어도 이어지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공예다움을 떠나 공예가 있을 수 없음을 역설한 야나기는 왜 민중을 떠난 민예를 그렇게도 지키려고 했을까.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실로 놀라울 수는 있어도, 스스로에게 있어서의 ‘미’는 자신의 입과 손끝으로 말한 ‘미’와는 분명 달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제껏 있던 조선 대중의 생활을 ‘민예’로 정리한 업적을 남겼지만, 그가 이해한 것은 ‘민예’이지, 민중이 무심(無心)하게 생활 속에서 지니던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는, 끝까지 믿음이 깊었던, 외부인(外部人)으로 머무른 비애의 미학자였으리라고 생각해본다.
참고문헌
나카미 마리, (미학적 아나키스트)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 2005, 효형출판.
쓰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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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3.04
  • 저작시기2013.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6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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