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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친일문학의 발생론적 근거

Ⅲ. 친일문학의 인식
1. 친일문학에 대한 개념을 묻는 질문
2. 친일문인에 대한 인지도를 묻는 질문
3. 구체적인 친일문학작품에 대한 인지도
4. 친일문학을 창작한 주된 이유에 대한 생각
5. 본인의 친일문인이었다는 가정 질문

Ⅳ. 친일문학과 친일시

Ⅴ. 친일문학과 친일문인(친일작가)

Ⅵ. 친일문학과 코스모폴리탄의식

참고문헌

본문내용

물결은 더 이상 작은 파도가 아니어서 욱일승천의 기세를 떨쳤고, 급기야는 동양의 중세를 상징하는 중국을 무너뜨렸다. 파시즘이 최재서를 혼란에 빠뜨린 것은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일본제국주의의 마지막 발악에 가까운 강압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 때문에 최재서 나아가 당대의 작가 대부분이 혼란에 빠졌던 이유는 자신들이 모범으로 설정한 사회에서 지성이나 이성, 혹은 합리성과는 무관한 파시즘이 발생했다는 사실과 그렇게 발생한 파시즘이 근대사회 전체를 전복시키고 세계의 또 하나의 질서로 자리잡는 듯한 당시의 현실적 정세에 연유한다.
파시즘의 형성과 확대재생산 과정은 한국근대문학이라는 장을 유지하게 하던 모든 필연적인 근거를 일시에 뒤흔들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절대악으로 다가왔던 전근대의 규범을 지워내고 그 자리에 절대선으로 비쳐졌던 서구라는 보편 세계를 이식하고자 했다. 그런데 절대선이라고 믿어 왔던,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좇고자 했던 서구라는 보편세계에서 그들이 절대악이라 상정했던 낡은 질서보다 더 악마적인 요소가 싹텄고, 게다가 서구 전체가 그 악마적인 요소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는 현실이 목격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작가들은 그러한 현실의 전개과정에서 그들이 종교적으로 경배하던 자본주의적 역동성은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전율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그들은 영원한 파괴와 쇄신이라는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기존의 모든 사회적 내용과 형식을 환골탈태시켜 사회주의라는 길로 이끌거나, 아니면 자본주의라는 물신적, 에로티즘적 분위기가 인간의 모든 영혼을 빼앗아 영원히 인공낙원의 사회가 존속시킬 것이라는 역사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닥친 사회는 그것이 아니었다. ‘야만주의’ ‘혈족주의’를 표방하는 파시즘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사가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한마디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보편세계로 혹은 미래로 옮겨주리라 믿었던 자본주의적 역동성을 더 이상 종교적 차원에서 숭배할 수 없게 되었고, 그렇게 자본주의적 역동성이라는 신화는 깨져나갔다. 백철이 1930년대 후반기의 상황을 두고 “진리보다는 속사(俗事)의 시대요 질과 필연이 아니요 양과 우연의 시기”로 부른 것도, 유항림이 “2×2는 4는 사(死)의 처름이다. 그 아래 난잡한 글씨로 그리고 2×2는 5는 발광의 처음이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사정과 관련이 깊다. 최재서가 1937년경부터 서구적 지성에 회의의 시선을 보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임은 물론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1930년대 후반기는 한편으로는 위기적 상황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근대문학사에 주어진 중요한 전환의 계기이기도 하다. 당대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근대문학이라는 장을 유지시켜 주었던 근거가 심하게 훼손을 당했기 때문에 새롭게 방향성을 찾아야 했고 또 그 방향성이 쉽게 찾아지지 않았으므로 위기적 상황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한국근대문학이라는 장이 그 출발점부터 현실의 미세한 문제를 범박한 문제틀에 밀어넣어버리는 인식상의 폭력을 자주 행해왔다고 한다면, 이러한 출발점이 근거부터 흔들린 이 시기는 오히려 현실의 본질 속으로 다가설 수 있는 중요한 시기로 작용할 수도 있다. 이러한 위기적인 상황 혹은 문학사적 전환의 시기에서 당대 문인들이 선택한 길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존의 장의 구조를 부정하고 새로운 장을 형성하는 길. 기존의 장의 구조가 자본주의적 역동성을 절대화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역동성이 한국 사회에 어떻게 관철되는가 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루지 못하게 했다면, 기존의 장을 반성하는 길은 곧 편협하나마 전통적인 요소와 자본주의적 역동성 간의 길항관계를 따져보는 일일 터이다. 진정한 리얼리즘으로의 전회인 셈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기존의 장의 구조를 유지하는 것. 당대 문인들은 두 가지 방식으로 기존의 한국근대문학이라는 장의 구조를 유지한다. 기존의 장을 유지하기 위해 동원된 첫 번째 방법은 1930년대 후반기의 더욱 열악해진 상황을 자본주의 역동성에 대한 종교적 숭배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넘으려는 순교자적 자세이다. 즉 상황이 열악할수록 보편성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물리적인 힘으로 전환하려는 노력이 더욱 절실하며, 그러한 주체의 능동성을 통해 현실을 자신이 꿈꾸는 세계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실천을 아껴서는 안된다고 파악하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은 철저한 금욕주의적 자세여서 쉽게 권태를 느낄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종내 자신의 신이 어떠한 은총도 베풀지 않을 때 또 다른 신을 섬기는 배교자가 될 개연성이 농후하다. 기존의 장을 유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회주의사회나 인공낙원의 상태보다도 한 단계 더 발전된 역사적 발전단계를 설정하는 방식이다. 예컨대 이전까지는 이러이러한 것을 미래상으로 설정했지만 그것은 한계가 분명한 것이며 따라서 보다 더 나은 이러이러한 미래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식의 틀을 확립하는 것이다. 이 길은 이제까지 자신의 문학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아도 가능하며, 또한 역사의 심층구조를 보지 못했다는 표면적인 반성만으로도 과거의 문학세계가 의미 있는 것으로 용인되는 길이기도 하다. 동양체제론은 이러한 길의 대표적인 경우일 터이다. 서양의 세계가 서서히 한계에 봉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그 세계에 맹목적으로 집착했던 것은 진정한 미래상인 동양체제를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제 비로소 동양체제가 진정한 미래상으로 자리한 만큼 그 미래상을 위해 금욕적 실천을 행해야 한다는 진술체계는 기실 이전의 장의 구조를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방법이리라.
참고문헌
김재용(2002), 친일문학의 자발성과 내적 논리, 교수신문
남궁경현(2010), 친일문학작품 교육방법에 대한 연구, 동국대학교
임헌영(2004), 친일문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새한국문학회
유성호(2002), 친일문학과 근대 민족주의의 명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정창석(1999), 친일문학의 언어문제, 동아시아일본학회
조동구(1994), 친일문학 연구친일문학논리의 형성과 전개를 중심으로, 부경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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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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