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忠) 교훈자료, 충성하는 어린이]충(忠) 교훈자료 사례1(충성하는 어린이), 충(忠) 교훈자료 사례2(김만중의 이야기), 충(忠) 교훈자료 사례3(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현충일), 충(忠) 교훈자료 사례4(역사적 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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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충(忠) 교훈자료, 충성하는 어린이]충(忠) 교훈자료 사례1(충성하는 어린이), 충(忠) 교훈자료 사례2(김만중의 이야기), 충(忠) 교훈자료 사례3(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현충일), 충(忠) 교훈자료 사례4(역사적 위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충(忠) 교훈자료 사례1(충성하는 어린이)

Ⅲ. 충(忠) 교훈자료 사례2(김만중의 이야기)

Ⅳ. 충(忠) 교훈자료 사례3(충무공 이순신장군과 현충일)
1. 이 충무공 탄신일
2. 현충일

Ⅴ. 충(忠) 교훈자료 사례4(역사적 위인)
1. 이중섭
2. 최치원
3. 최윤덕
4. 석주명
5. 김창숙
6. 권율

참고문헌

본문내용

걸작으로 꼽힌다.
1950년 선생 사후 간사이 의과대학 시바타니 아쓰히로(紫谷篤弘) 등 일본 학자들은 선생을 추모하여 신종(新種) 나비 학명에 선생의 성(姓)인 \"세오키아(Seokia, Seoki)\"를 헌명(獻名) 하였다.
이밖에도 선생은 제주도에 관한 방언문헌곤충인구자연 등을 연구한 제주도 총서 여섯권,〈조선나비이름유래기〉,〈중등동물교과서〉,〈에스페란토사전〉 등을 저술하였고 에스페란토학회, 한국산악회 등 사회 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ㅇ1950년 10월6일 사망, 건국공로훈장 추서, 유족으로는 외동딸(允希)이 미국 거주.
5. 김창숙
심산 김창숙(金昌淑 : 1879~1962) : 조국독립과 반외세, 반분단, 민주주의 수호 운동에 앞장선 유림출신 민족 운동가이자 성균관대 설립자인 선생은 1879년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사월리에서 부친 김호림(金頀林)과 모친 인동(仁同) 장씨(張氏) 사이에서 태어나 양친으로부터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27세가 되던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공포되자 서울로 가서 조약에 참가한 을사5적을 목벨 것을 상소하였고 1908년 30세 때에는 애국계몽운동 조직의 하나인 대한협회(大韓協會) 성주지부를 결성하고 구습타파와 차별적 계급타파운동에 앞장섰으며 이듬해인 1909년에는 \'한일합방론\'을 제창한 매국노를 성토하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하였고, 또 1910년 초에는 향리의 청천서당(晴川書堂)에 사립 성명학교(星明學校)를 세워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영남 및 충청도의 유림 137명의 연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휴대하고 중국 상해로 건너가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편으로 우송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유림단 사건 즉, 파리장서 사건이다. 또 그해 4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의 의원(경북대표)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중국 지도자 손문(孫文) 등과 회합하여 한.중 양민족의 협력과 공동투쟁 방안을 논의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만주와 몽고 접경지대에 새로운 독립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였고 그곳에 군정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1925년 국내에서 독립운동자금 모금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 후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일본경찰에 붙잡혀 옥중생활을 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받기도 하였으나 옥중에서도 일제에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의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선생은 신탁통치 반대투쟁과 남한만의 단독선거 반대투쟁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맡기도 하였다. 또 1946년 9월 유림의 지원을 토대로 성균관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을 맡아 교육운동에 투신하고 1950년대에는 정부의 부정과 부패에 항거하다 모든 공직에서 추방당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투철한 국가관을 가지고 살다가 생을 마친 김창숙 선생은 대의명분론에 입각하여 철저한 비타협의 선비정신을 고수한 진보적 유학자요 민족주의자라고 평가받고 있으며 선생의 숭고한 애국애족 정신은 후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6. 권율
권율(權慄, 1537~1599),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 이치대첩 등 수 많은 전투를 승리로 이끈 육전의 명장, 도원수권율 장군은 1537년 강화도 연동에서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 사헌부 감찰, 낭관 등을 거쳐 1591년 의주목사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로서 방어사 곽영(郭嶸)을 따라 서울을 수복하기 위하여 북진하다가 용인에 이르러 왜군에 패배를 당하고 광주로 되돌아갔다. 그 후 장군은 도내 유력 인사와 동맹을 맺고, 이웃 고을에 모병 격문을 돌렸으며, 지방민의 인심을 수습하고 안정시키기 위해 약법(約法)을 발표함으로써 1500여 명의 군사를 모아 전열을 재정비한 후 다시 북진하였다. 그 후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왜군을 맞아 싸워 격퇴시킴으로써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공으로 그해 나주목사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장군은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북진하여 수원의 독성(禿城)에 들어가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해오는 우키다(宇喜多秀家)군을 지구전과 유격전으로 격퇴하였다.
1593년 명나라 군과 협력하여 서울 수복작전을 펴기 위하여 군사 2천여 명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들어가 진을 쳤다. 그해 2월 왜장 총수 우키다를 비롯하여 왜군 3만 명이 공격하여 오자 일사불란한 통솔아래 관군과 의승병이 분전하여 적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혀 격퇴하였다. 이것이 행주대첩이다. 그 뒤 왜군의 재침을 경계하여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전세를 관망하였다.
그 동안 명과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상태에 들게 되자, 장군은 전라도로 돌아갔다. 그해 6월에 도원수가 되어 영남에 주둔하게 되었는데, 1595년에 도망병을 즉결 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 판윤에 재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 충청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명의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의 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퇴각령으로 철수하였고 순천의 왜군도 공격하려 하였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려하는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1599년에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서거한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다. 행주(幸州)의 기공사(紀功祠)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임진왜란을 통해서 보여주는 권율 장군의 애국. 애민정신, 유비무환의 정신, 공평무사의 정신, 엄정한 군기 등의 구국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제시해 주는 바가 크며, 가슴속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대은(1977), 충과 효에 대하여, 대한불교불입종
김인규(2011), 충사상의 본질과 한국적 전개, 퇴계학연구원
김종두(2010), 충·효 교육을 통한 인성함양과 리더십개발, 진영사
김철운(2000), 충 효 예와 인격, 충효예교육출판사
안희웅(1995), 충 이야기, 예림당
전정태(2000), 충, 효윤리문화의 소고, 한국문화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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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3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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