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한국광복군의 창설
Ⅲ. 한국광복군의 광복군선언문
Ⅳ. 한국광복군의 부대편제
1. 부대편제 개편의 배경
2. 총사령부
3. 지대 개편
1) 제 1지대
2) 제 2지대
3) 제 3지대
4) 기타부대
Ⅴ. 한국광복군의 군가
1. 광복군 군가 - 지대가
1) 광복군 제1지대가
2) 광복군 제2지대가
3) 광복군 제3지대가
2. 광복군 군가 - 용사의 노래
1) 광복군 지하공작대가
2) 선봉대가
3) 특전용사의 노래
4) 용사들의 노래(진군나팔)
5) 광복군 항일 전투가
3. 광복군 군가 - 행진곡
1) 광복군 행진곡
2) 압록강 행진곡
3) 조국 행진곡
Ⅵ. 결론
참고문헌
Ⅱ. 한국광복군의 창설
Ⅲ. 한국광복군의 광복군선언문
Ⅳ. 한국광복군의 부대편제
1. 부대편제 개편의 배경
2. 총사령부
3. 지대 개편
1) 제 1지대
2) 제 2지대
3) 제 3지대
4) 기타부대
Ⅴ. 한국광복군의 군가
1. 광복군 군가 - 지대가
1) 광복군 제1지대가
2) 광복군 제2지대가
3) 광복군 제3지대가
2. 광복군 군가 - 용사의 노래
1) 광복군 지하공작대가
2) 선봉대가
3) 특전용사의 노래
4) 용사들의 노래(진군나팔)
5) 광복군 항일 전투가
3. 광복군 군가 - 행진곡
1) 광복군 행진곡
2) 압록강 행진곡
3) 조국 행진곡
Ⅵ.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대장 등과 앞으로의 진로를 협의하였고, 여기서 “OSS훈련을 받은 제2지대 대원들을 국내정진대로 편성하여 가급적 신속히 국내로 진입시키자”는 것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참여하고 주도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8월 5일 서안에 도착하였던 김구는 정진대 파견을 결정하고, 이들이 국내로 출발하기 전날인 8월 17일 중경으로 돌아갔다.
‘정진대’의 파견은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한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인 동시에, 일종의 선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비롯한 광복군 수뇌부에서 정진대 파견을 결정한 것은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미군의 협력을 얻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여 건국의 기틀을 다지도록하기 위한 조치”였고, 정진대는 일제의 投降을 접수하기 위한 투항접수예비대이기도 했다. 우선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로 들여보내 일제의 투항을 접수하고,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편,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귀국을 위한 연락 및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다.
이범석장군은 OSS측과 국내정진군 파견문제를 교섭하였다. 훈련 책임자였던 싸전트에게 광복군이 시급히 국내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고, 싸전트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싸전트는 광복군의 국내진입문제를 즉각 곤명에 있는 OSS본부에 보고하였다. OSS측이 작성한 ‘독수리작전 8월 월례보고서’에 “육군대위 싸전트의 제안으로 한국인들로 구성된 승리의 사절단을 한반도로 보내는 계획을 준비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OSS측에서도 한반도에 대한 작전을 계속 수행하려고 하였다. 싸전트의 보고를 받은 OSS본부에서는 이범석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정진대 파견에 대한 계획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이 파견대의 임무는 일본의 항복 때까지 정보보고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OSS문서팀들을 위한 기반을 닦을 것이다”라 하고 있다. 우선 광복군의 정진대를 한반도에 파견하여 정보수집활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한편, OSS의 활동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정진대를 파견하는 문제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가급적 빨리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키려는 광복군측의 의도와 한반도에 활동기반을 마련하려는 OSS측의 의도가 결합되었던 때문이었다. 중국전구 미군사령부에서는 “포츠담선언에 따라 한국에 있는 연합군포로들에 대한 위무와 협조를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웨드마이어 장군의 지시하에 OSS의 사절단을 구성하였다. OSS에서 한반도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는 임시정부측과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서안에는 임정 주석 김구와 광복군총사령 이청천장군이 머물고 있었고, 광복군총사령부에서 8월 13일 이범석장군에게 “중국전구 미군사령부가 수일내에 사절단을 서안에서 서울로 들여보내니 그 편에 편승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로써 광복군 ‘정진대’는 OSS작전팀과 함께 국내로 진입하게 되었다. 비행기의 적재무게 한계로 인해 파견대원의 숫자를 극히 제한하였던 것 같다. 광복군 측에서는 7명의 파견대원을 선발하였지만, 지대장 이범석을 비롯하여 김준엽장준하노능서 등 4명만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OSS측은 책임자 버드대령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었고, 이중에는 한국인 미공군장교인 정운수가 버드대령의 통역으로 참여하였다.
광복군 ‘정진대’가 OSS와 함께 국내로 향한 것은 일제의 공식적인 항복선언이 있은 다음날인 8월 16일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서안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비행기가 산동반도에 이르렀을 때, 미군항공모함들이 일본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받고 또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책임자인 버드대령은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고, 이들은 서안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재차 국내진입을 시도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산동반도까지 갔다가 돌아온 비행기는 수리하는 과정에서 날개에 고장이 났다. 미국측에서는 중경에서 대체비행기 C-47을 가져왔다. 이 비행기로 8월 18일 새벽 5시 50분에 서안을 출발하였고, 6시간의 비행 끝에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비행장 착륙과 동시에 이들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일본군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장준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선전신으로 착륙한다는 것을 일본군에 알린 후 마침내 여의도 비행장에 나리니 비행장에는 上月井原 등 군사령관과 참모장을 비롯하야 보병과 헌병 약 1중대가 총 끝에 칼을 꼬자들고 무시무시한 전투태세로 물샐틈업시 포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비행장 착륙은 허락하였지만, 착륙 즉시 이들을 포위하고 어떠한 활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버드대령이 일본군 측에 “중국전구 미국사령관 웨드마이어의 지시하에 연합군포로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예비대표로 왔다”고 하면서, 아부총독에게 이를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信任狀이 없다는 것과 東京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정진대는 일본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어떠한 활동도 취하기 어려웠다. 버드대령은 “일본의 항복서명이 있을 때까지 체류하다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즉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다시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일본군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일본군측에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면서, 탱크와 박격포기관총 등을 배치하고 위협하였다. 결국 정진대는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본군이 가져다 준 휘발유를 채우고 착륙한지 28시간여만인 8월 19일 오후 4시에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고, 산동성의 유현비행장을 거쳐 8월 28일 서안으로 귀환하였다.
참고문헌
○ 김광재(2006),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 한국사학회
○ 김창수(2003), 한국광복군의 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삼균학회
○ 백기인(2006), 한국 광복군의 창군과 항일 투쟁, 한국군사학회
○ 한시준(2000), 한국광복군의 활동과 역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한시준(1992), 한국광복군의 창설 배경,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2007), 한국광복군의 민족사적 위상, 한국광복군동지회
‘정진대’의 파견은 일제의 항복으로 실행되지 못한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인 동시에, 일종의 선발대라고도 할 수 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비롯한 광복군 수뇌부에서 정진대 파견을 결정한 것은 “광복군을 국내에 진입시켜 미군의 협력을 얻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치안을 유지하여 건국의 기틀을 다지도록하기 위한 조치”였고, 정진대는 일제의 投降을 접수하기 위한 투항접수예비대이기도 했다. 우선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로 들여보내 일제의 투항을 접수하고, 이들로 하여금 국내의 치안을 담당하는 한편,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귀국을 위한 연락 및 준비를 하려고 한 것이다.
이범석장군은 OSS측과 국내정진군 파견문제를 교섭하였다. 훈련 책임자였던 싸전트에게 광복군이 시급히 국내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을 설득하였고, 싸전트는 이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싸전트는 광복군의 국내진입문제를 즉각 곤명에 있는 OSS본부에 보고하였다. OSS측이 작성한 ‘독수리작전 8월 월례보고서’에 “육군대위 싸전트의 제안으로 한국인들로 구성된 승리의 사절단을 한반도로 보내는 계획을 준비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OSS측에서도 한반도에 대한 작전을 계속 수행하려고 하였다. 싸전트의 보고를 받은 OSS본부에서는 이범석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여 정진대 파견에 대한 계획을 준비한다고 하면서 “이 파견대의 임무는 일본의 항복 때까지 정보보고를 할 예정이다. 그리고 OSS문서팀들을 위한 기반을 닦을 것이다”라 하고 있다. 우선 광복군의 정진대를 한반도에 파견하여 정보수집활동을 전개하도록 하는 한편, OSS의 활동기반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정진대를 파견하는 문제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가급적 빨리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키려는 광복군측의 의도와 한반도에 활동기반을 마련하려는 OSS측의 의도가 결합되었던 때문이었다. 중국전구 미군사령부에서는 “포츠담선언에 따라 한국에 있는 연합군포로들에 대한 위무와 협조를 위해 사절단을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웨드마이어 장군의 지시하에 OSS의 사절단을 구성하였다. OSS에서 한반도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문제는 임시정부측과 사전 협의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서안에는 임정 주석 김구와 광복군총사령 이청천장군이 머물고 있었고, 광복군총사령부에서 8월 13일 이범석장군에게 “중국전구 미군사령부가 수일내에 사절단을 서안에서 서울로 들여보내니 그 편에 편승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이로써 광복군 ‘정진대’는 OSS작전팀과 함께 국내로 진입하게 되었다. 비행기의 적재무게 한계로 인해 파견대원의 숫자를 극히 제한하였던 것 같다. 광복군 측에서는 7명의 파견대원을 선발하였지만, 지대장 이범석을 비롯하여 김준엽장준하노능서 등 4명만이 최종적으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OSS측은 책임자 버드대령을 포함하여 모두 18명이었고, 이중에는 한국인 미공군장교인 정운수가 버드대령의 통역으로 참여하였다.
광복군 ‘정진대’가 OSS와 함께 국내로 향한 것은 일제의 공식적인 항복선언이 있은 다음날인 8월 16일이었다. 새벽 4시 30분에 서안을 출발하였다. 그러나 비행기가 산동반도에 이르렀을 때, 미군항공모함들이 일본전투기로부터 공격을 받고 또 여러 지역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책임자인 버드대령은 돌아갈 것을 명령하였고, 이들은 서안으로 되돌아 와야 했다.
재차 국내진입을 시도한 것은 8월 18일이었다. 산동반도까지 갔다가 돌아온 비행기는 수리하는 과정에서 날개에 고장이 났다. 미국측에서는 중경에서 대체비행기 C-47을 가져왔다. 이 비행기로 8월 18일 새벽 5시 50분에 서안을 출발하였고, 6시간의 비행 끝에 12시경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였다.
비행장 착륙과 동시에 이들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일본군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장준하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무선전신으로 착륙한다는 것을 일본군에 알린 후 마침내 여의도 비행장에 나리니 비행장에는 上月井原 등 군사령관과 참모장을 비롯하야 보병과 헌병 약 1중대가 총 끝에 칼을 꼬자들고 무시무시한 전투태세로 물샐틈업시 포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군은 비행장 착륙은 허락하였지만, 착륙 즉시 이들을 포위하고 어떠한 활동도 용납하지 않았다. 버드대령이 일본군 측에 “중국전구 미국사령관 웨드마이어의 지시하에 연합군포로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예비대표로 왔다”고 하면서, 아부총독에게 이를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 측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信任狀이 없다는 것과 東京으로부터 아무런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정진대는 일본군에 포위된 상태에서 어떠한 활동도 취하기 어려웠다. 버드대령은 “일본의 항복서명이 있을 때까지 체류하다가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즉시 활동할 수 있도록 할 것”을 다시 요구하였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일본군측에 의해 거부되었다. 일본군측에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고 하면서, 탱크와 박격포기관총 등을 배치하고 위협하였다. 결국 정진대는 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일본군이 가져다 준 휘발유를 채우고 착륙한지 28시간여만인 8월 19일 오후 4시에 여의도 비행장을 이륙하였고, 산동성의 유현비행장을 거쳐 8월 28일 서안으로 귀환하였다.
참고문헌
○ 김광재(2006), 조선의용군과 한국광복군의 비교 연구, 한국사학회
○ 김창수(2003), 한국광복군의 창군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삼균학회
○ 백기인(2006), 한국 광복군의 창군과 항일 투쟁, 한국군사학회
○ 한시준(2000), 한국광복군의 활동과 역할,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한시준(1992), 한국광복군의 창설 배경,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 한국광복군동지회 주최(2007), 한국광복군의 민족사적 위상, 한국광복군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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