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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픈 것으로 인식되지 않음을 반영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죽음은 흘러감과 상실에 대한 슬픔보다 더 특별한 슬픔이라곤 할 수 없다. 오히려 죽음을 맞는 것은 ‘생의 오랜 냉가슴’에 ‘뜨거운 평안을 안겨줄’ 대상이기 때문이다.
다시 삶을 노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삶을 노래하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자연의 모습에서부터 그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신록으로 푸르렀던 자연 조차도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 그 빛을 잃고 죽음의 색을 띤 채 죽음을 맞이하고는 한다. 그러나 생의 퇴색을 보여주는 가녀린 낙엽마저도 일종의 놀라운 기적과 같이 그 희미한 생을 붙잡고 광풍 속에서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움직이고 있다. 자연이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작은 힘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인간 역시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과 미래의 긍정이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던 중 불현듯 깨달은 생각이라 말해도 좋을까.
놀라워라, 광풍이 불어도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앉는 낙엽, 낙엽, 낙엽, 저 야윈 나무들의 하찮은 기적, 기적, 기적, 불어라 바람아, 바람이 불어도, 사람은, 바람 속에서,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어라 바람아」중에서)
인간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바로 그러한 시간의 안쪽 둘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비린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 꼽추처럼 움츠러든 삶과 미래를 살아낼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삶의 진행은 각종 아픈 장면과 상실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하나의 ‘역사’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 역사 안에 들어 있는 아버지, 옛 사랑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고 ‘가장 먼저 등 돌리는’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아서 낙엽과 하루살이처럼 그저 영원을 숭배하며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인을 계속 살아가도록, 그렇게 노래하도록 만든 것일까. 심보선은 수많은 삶의 장면들을 지나올 때 자신이 남겨온 ‘쪼르르 난 내 발자국’ 을 그 해답으로 찾는다.
옛 애인이던가, 전처던가 / 그미들 옆에 쪼르르 난 내 발자국이던가 / 가장 먼저 사라지데/ 가장 사랑하던 것들 / 추억을 뒤집으니 그냥 시꺼멓데/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 / 나쁜 냄새가 난다 / 발자국을 짓밟으며 나는 미래로 간다 / 강변 살자, 부르튼 발들아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중에서)
시인은 그 ‘발자국을 밟고 미래로’ 갈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담겨있을 발자국을 밟고 가면, 강변과 같은 미래에도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발자국은 그의 삶의 궤적, 경험들이 아직 남아있는 하나의 십장생은 아니다. 영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발자국들은 새기고 난 후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그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발자국들을 찍어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일들, 상처들이 가슴에 새겨질 때 나의 발자국을 함께 만들어 냈던 부르튼 발들은 결국 강변에 이른다. 발자국을 짓밟고 앞으로, 미래로 간다는 것은 바로 삶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시인의 앞으로도 그러하겠다는 다짐이, 그리고 그것이 강변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그가 삶 속 수많은 슬픔들과 고통들을 극복하거나, 해소하거나, 무엇인가로 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그저 안고 간다. 그것들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발자국이며, 그 발자국을 찍어낸 발은 여전히 그의 일부이고 지나온 일들에 의해 지금 부르터 있다. 이 발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부르틀 것이다. 상실과 또 다른 슬픔과 고통들 때문에 갈수록 추해지고 ‘나쁜 냄새’가 날 지라도 자기 것으로 안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포기나 체념과는 다른 계속될 삶에 대한 긍정이며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삶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삶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시인 자신의 삶을 면면히 그리고 깊이 훑어본 후에 완성된 이 시집의 과정은 어떤 시들보다 우리 안에 와-닿았다. 그리고 삶을 긍정해나가도록 하는 ‘설득’에 성공하였다. 심보선의 부르튼 발은 또 다시 발자국을 찍어 낼 것이다. 삶을 노래하며 미래로 나아갈 심보선의 다음 발자국이 기대된다.
다시 삶을 노래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다시 삶을 노래하고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자연의 모습에서부터 그는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 때 신록으로 푸르렀던 자연 조차도 바람이 부는 가을이 되면 그 빛을 잃고 죽음의 색을 띤 채 죽음을 맞이하고는 한다. 그러나 생의 퇴색을 보여주는 가녀린 낙엽마저도 일종의 놀라운 기적과 같이 그 희미한 생을 붙잡고 광풍 속에서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움직이고 있다. 자연이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작은 힘을 가지고 살아갈 때, 인간 역시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과 미래의 긍정이 시인이 자연을 바라보던 중 불현듯 깨달은 생각이라 말해도 좋을까.
놀라워라, 광풍이 불어도 한 치의 오류 없이, 제 그림자를 정확히 찾아 앉는 낙엽, 낙엽, 낙엽, 저 야윈 나무들의 하찮은 기적, 기적, 기적, 불어라 바람아, 바람이 불어도, 사람은, 바람 속에서, 불멸을 숭배하는 하루살이의 날갯짓처럼, 사는 것이다, 살아야 하는 것이다,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불어라 바람아」중에서)
인간은 시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바로 그러한 시간의 안쪽 둘레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비린 안쪽에 웅크리고’ 앉아 꼽추처럼 움츠러든 삶과 미래를 살아낼 수밖에 없다.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 삶의 진행은 각종 아픈 장면과 상실들을 수도 없이 만들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삶을 하나의 ‘역사’라고 불러도 좋다면 그 역사 안에 들어 있는 아버지, 옛 사랑들은 사라질 수밖에 없고 ‘가장 먼저 등 돌리는’ 기억으로밖에 남지 않아서 낙엽과 하루살이처럼 그저 영원을 숭배하며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시인을 계속 살아가도록, 그렇게 노래하도록 만든 것일까. 심보선은 수많은 삶의 장면들을 지나올 때 자신이 남겨온 ‘쪼르르 난 내 발자국’ 을 그 해답으로 찾는다.
옛 애인이던가, 전처던가 / 그미들 옆에 쪼르르 난 내 발자국이던가 / 가장 먼저 사라지데/ 가장 사랑하던 것들 / 추억을 뒤집으니 그냥 시꺼멓데/ 나는 갈수록 추해진다 / 나쁜 냄새가 난다 / 발자국을 짓밟으며 나는 미래로 간다 / 강변 살자, 부르튼 발들아 (「나는 발자국을 짓밟으며 미래로 간다」 중에서)
시인은 그 ‘발자국을 밟고 미래로’ 갈 것이다. 그의 삶의 궤적이 담겨있을 발자국을 밟고 가면, 강변과 같은 미래에도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발자국은 그의 삶의 궤적, 경험들이 아직 남아있는 하나의 십장생은 아니다. 영원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그 발자국들은 새기고 난 후 사라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앞으로 나가게 하는, 그저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계속해서 다른 발자국들을 찍어내도록 만드는 것이다. 수많은 일들, 상처들이 가슴에 새겨질 때 나의 발자국을 함께 만들어 냈던 부르튼 발들은 결국 강변에 이른다. 발자국을 짓밟고 앞으로, 미래로 간다는 것은 바로 삶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시인의 앞으로도 그러하겠다는 다짐이, 그리고 그것이 강변일 것이라는 전망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은 그가 삶 속 수많은 슬픔들과 고통들을 극복하거나, 해소하거나, 무엇인가로 승화시키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 그는 그저 안고 간다. 그것들 역시 자신이 만들어낸 발자국이며, 그 발자국을 찍어낸 발은 여전히 그의 일부이고 지나온 일들에 의해 지금 부르터 있다. 이 발은 아마 앞으로도 계속 부르틀 것이다. 상실과 또 다른 슬픔과 고통들 때문에 갈수록 추해지고 ‘나쁜 냄새’가 날 지라도 자기 것으로 안고 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포기나 체념과는 다른 계속될 삶에 대한 긍정이며 ‘아무리 휘저어도 끝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이를테면 수저 자국이 서서히 사라지는 흰죽 같은 삶으로’ 우리의 곁을 떠나지 않는 삶의 본래적인 모습이다. 시인 자신의 삶을 면면히 그리고 깊이 훑어본 후에 완성된 이 시집의 과정은 어떤 시들보다 우리 안에 와-닿았다. 그리고 삶을 긍정해나가도록 하는 ‘설득’에 성공하였다. 심보선의 부르튼 발은 또 다시 발자국을 찍어 낼 것이다. 삶을 노래하며 미래로 나아갈 심보선의 다음 발자국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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