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우리는 에돔 사람이 암몬 사람보다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더욱 해를 입혔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민20:20) 20.그는 이르되 너는 지나가지 못하리라 하고 에돔 왕이 많은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강한 손으로 막으니(민20:20)
.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은”암몬 사람들을 미워하듯이 “에돔 사람을 미워 할 수 없었다.”우리의 가까운 혈족은 비록 그들이 잘못했더라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애굽 사람에게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들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별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옛날을 생각하여 그를 아무리 학대를 했더라도,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애굽 사람들이 그들에게 행한 악행을 기억지 말고 오로지 그들을 구해내신 여호와의 선함과 권능을 찬미하여야 한다.
Ⅲ.결론 두에인 L. 크리스텐센, 『신명기21:10-34:12』정일오 역(서울: 솔로몬, 2007[Duane L. Christense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6B Deuteronomy 21:10-34:12,])
23:2-9에 있는 야웨의 총회에 가입하는 것을 제한시키고 있는 법의 배후에 있는 근거는 어떤 비정상적 결합에 의하여 낳은 자가 아니라 육신적으로 온전한 사람만이 고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정도 산상 설교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표면상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하나님의 거룩은 그분의 임재에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완전을 요구한다.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완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데, 그분은 도덕적으로든, 육신적으로든 그리고 영적으로든 사람들의 불완전과는 상관없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수단을 제공하신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의 완전하심으로 옷 입은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의 존전 안에 서 있다.
‘총회’라는 히브리어 단어 ‘카할’은 본래 ‘모으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할’에서 나온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야 했으며(신4:10),하나님과 계약을 맺거나, 율법을 받기 위해 모여야 했고(신5:22;9:10;10:4),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이게 되었다(신31:12).‘야웨의 총회’라는 표현은 신명기에서는 단지 신명기 23장에서만 쓰이고 있다. 오경에서는 민수기 16장:3과 20:4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제사장직에 대해 불평하는 모세와 아론의 적대자인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신명기 23장의 6절과 7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이스라엘과 에돔, 이스라엘과 애굽은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계약을 체결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신명기 23:8에서 말하는 ‘야웨의 총회’는 계약 동맹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육체적인 불구를 기뻐하거나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분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고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사56:4-5; 또한 행8:27-39에서 빌립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에디오피아 내시 이야기를 참조하라).
티개이는 여기에 언급된 “총회”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즉 온 백성으로 이루어진 국가를 다스리는 공동체 혹은 본회의(총회)에 모이는 모든 성인 남자들, 그리고 가끔은 행정 위원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대표자들을 가리킨다. 이 총회는 이를테면 전쟁, 즉위식, 법적인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는 일, 땅을 분배하고 예배하는 일과 같은 공적인 업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모인다. 이것은 에다(“공동체”)와 동의어인데, 이것 역시 전 국가, 남자 성인들(특히 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나라를 대신하는 행정관으로 행동하는 지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Tigay[1996] 210). 그는 이 총회를 아덴의 에클레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성읍들 가운데 있었던 푸흐룸(puhrum)과 같이 고대 세계에서 이와 유사한 민중 총회와 비교한다. 이 곳2-9절에서 말하고 있는 점은 국가 자체 안에(2-3절) 그리고 인접한 백성들 가운데(4-9절)어떤 형태의 백성들이 이러한 통치 그룹 모임의 일원으로 가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명기가 티개이가 고대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도시-국가 모델 면에서 묘사한 내용보다는 더 복잡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왕국 시대 이전의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형태의 총회가 있었다: 즉 순례 절기와 국가의 위기 때 있었던 중앙 성소에서의 총회, 그리고 레위인의 성읍들(특히 여섯 개의 도피성)이라는 구조 내에서 있었던 지방 총회다. 야웨의 총회(hw:hy] lh'q-카할 야웨)는 아마도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구조 내에 있는 이 두 차원의 총회를 모두 포함했을 것이다. 이 법의 주안점은 오츠라트(,“성스러운 총회”)에서 매7주마다 있었던 이 모임에서 어떤 민족의 개인과 그룹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다는 것인데, 이 성스러운 총회 중 몇몇은 지방에서 모였고, 다른 총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장소”곧 중앙 성소에서 모였다.
< 참고문헌 >
1. 두에인 L. 크리스텐센, 『신명기21:10-34:12』정일오 역(서울: 솔로몬, 2007[Duane L. Christense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6B Deuteronomy 21:10-34:12,])
2. 두란노 HOW주석『신명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역(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09)
3. 매튜 헨리『성서주석시리즈 신명기』박근용 역(서울: 기독교문사. 1975)
4. 박윤선 『구약주석 신명기』A Commentary on Deuteronmy (서울: 영음사 1971)
5. 아가페『개역개정 성경전서』(서울: 대한성서공회, 2000)
6. 유율 『신명기 총회 구성원 법의 저술 배경』(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9)
. 그러나 에돔 사람들은 그들의 형제이므로, “이스라엘 백성은”암몬 사람들을 미워하듯이 “에돔 사람을 미워 할 수 없었다.”우리의 가까운 혈족은 비록 그들이 잘못했더라도 먼저 용서해 주어야 한다. 그러나 애굽 사람에게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왜 이들을 미워해서는 안 되는가에 대해서 별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옛날을 생각하여 그를 아무리 학대를 했더라도,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애굽 사람들이 그들에게 행한 악행을 기억지 말고 오로지 그들을 구해내신 여호와의 선함과 권능을 찬미하여야 한다.
Ⅲ.결론 두에인 L. 크리스텐센, 『신명기21:10-34:12』정일오 역(서울: 솔로몬, 2007[Duane L. Christense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6B Deuteronomy 21:10-34:12,])
23:2-9에 있는 야웨의 총회에 가입하는 것을 제한시키고 있는 법의 배후에 있는 근거는 어떤 비정상적 결합에 의하여 낳은 자가 아니라 육신적으로 온전한 사람만이 고대 이스라엘 언약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은 어느 정도 산상 설교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표면상의 내용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하나님의 거룩은 그분의 임재에로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완전을 요구한다.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이러한 완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데, 그분은 도덕적으로든, 육신적으로든 그리고 영적으로든 사람들의 불완전과는 상관없이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수단을 제공하신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예수님 자신의 완전하심으로 옷 입은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의 존전 안에 서 있다.
‘총회’라는 히브리어 단어 ‘카할’은 본래 ‘모으다’라는 의미의 동사 ‘카할’에서 나온 것으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야 했으며(신4:10),하나님과 계약을 맺거나, 율법을 받기 위해 모여야 했고(신5:22;9:10;10:4), 종교적인 목적으로 모이게 되었다(신31:12).‘야웨의 총회’라는 표현은 신명기에서는 단지 신명기 23장에서만 쓰이고 있다. 오경에서는 민수기 16장:3과 20:4에서 사용되고 있으며, 제사장직에 대해 불평하는 모세와 아론의 적대자인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신명기 23장의 6절과 7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이스라엘과 에돔, 이스라엘과 애굽은 평화와 번영을 위해 계약을 체결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신명기 23:8에서 말하는 ‘야웨의 총회’는 계약 동맹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육체적인 불구를 기뻐하거나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믿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분의 계명을 신실하게 지키는 고자들에게까지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사56:4-5; 또한 행8:27-39에서 빌립의 전도를 받고 회심한 에디오피아 내시 이야기를 참조하라).
티개이는 여기에 언급된 “총회”를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이스라엘 사람들, 즉 온 백성으로 이루어진 국가를 다스리는 공동체 혹은 본회의(총회)에 모이는 모든 성인 남자들, 그리고 가끔은 행정 위원으로 행동하는 그들의 대표자들을 가리킨다. 이 총회는 이를테면 전쟁, 즉위식, 법적인 소송에서 판결을 내리는 일, 땅을 분배하고 예배하는 일과 같은 공적인 업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모인다. 이것은 에다(“공동체”)와 동의어인데, 이것 역시 전 국가, 남자 성인들(특히 무장한 사람들) 그리고 나라를 대신하는 행정관으로 행동하는 지파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Tigay[1996] 210). 그는 이 총회를 아덴의 에클레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성읍들 가운데 있었던 푸흐룸(puhrum)과 같이 고대 세계에서 이와 유사한 민중 총회와 비교한다. 이 곳2-9절에서 말하고 있는 점은 국가 자체 안에(2-3절) 그리고 인접한 백성들 가운데(4-9절)어떤 형태의 백성들이 이러한 통치 그룹 모임의 일원으로 가입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신명기가 티개이가 고대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에서 발견된 도시-국가 모델 면에서 묘사한 내용보다는 더 복잡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왕국 시대 이전의 이스라엘에는 두 가지 형태의 총회가 있었다: 즉 순례 절기와 국가의 위기 때 있었던 중앙 성소에서의 총회, 그리고 레위인의 성읍들(특히 여섯 개의 도피성)이라는 구조 내에서 있었던 지방 총회다. 야웨의 총회(hw:hy] lh'q-카할 야웨)는 아마도 이러한 종교적-정치적 구조 내에 있는 이 두 차원의 총회를 모두 포함했을 것이다. 이 법의 주안점은 오츠라트(,“성스러운 총회”)에서 매7주마다 있었던 이 모임에서 어떤 민족의 개인과 그룹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다는 것인데, 이 성스러운 총회 중 몇몇은 지방에서 모였고, 다른 총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려고 택하신 장소”곧 중앙 성소에서 모였다.
< 참고문헌 >
1. 두에인 L. 크리스텐센, 『신명기21:10-34:12』정일오 역(서울: 솔로몬, 2007[Duane L. Christensen. Word Biblical Commentary Volume 6B Deuteronomy 21:10-34:12,])
2. 두란노 HOW주석『신명기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목회와신학 편집부 역(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09)
3. 매튜 헨리『성서주석시리즈 신명기』박근용 역(서울: 기독교문사. 1975)
4. 박윤선 『구약주석 신명기』A Commentary on Deuteronmy (서울: 영음사 1971)
5. 아가페『개역개정 성경전서』(서울: 대한성서공회, 2000)
6. 유율 『신명기 총회 구성원 법의 저술 배경』(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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