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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 비통함과 피난의 고난 속에, 이제는 아무런 꾸밈없이 자기들의 비분과 격정을 〈사〉로 노래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다시 격률이나 자구 표현은 돌볼 겨를도 없이 자신의 비통한 정회를 그대로 〈사〉를 통해 쏟아 놓았다. 따라서 이는 소식의 호방한 풍격의 〈사〉의 재흥(再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사〉는 주돈유, 육유(陸游1125-1210), 신기질(辛棄疾1140-1207), 등이 대표하며, 시기는 뒤지나 유극장도 여기에 속하는 풍격의 〈사〉를 썼다.
5. 남송 후기의 사
남송南宋 초기에는 사대부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에도 민족주의적인 격정이 넘쳤지만 12세기 중반 남송의 왕조와 사대부들이 金과의 전쟁보다는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선택함에 따라 민족주의적 격정은 차츰 퇴조하게 되었다. 이에 다시 사대부들은 나라 걱정을 잊고 연락에 빠지게 되어 宋詞 또한 민족주의적 격정이나 남성적 결의보다는 현실안주적이고 도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퇴영적인 사풍詞風으로 귀결되었다. 사詞는 생동감을 잃고 음률과 형식에 따라 글자들을 맞추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인들을 격률파(格律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송에 성행한 〈사〉가 남송에 들어와 형식화한 끝에 쇠미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책임은 〈격률파〉에게 있다 해도 좋을 것이며 대표적 작가로는 강기(姜夔1155-?), 사달조(史達祖1160-1210), 장염(張炎1248-1320?) 등이 꼽힌다.
《참고자료》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이수웅 저
중국문학사 김학주 저 신아사
중국문화와 중국문학 개관 강신웅 저
5. 남송 후기의 사
남송南宋 초기에는 사대부사회는 물론 시민사회에도 민족주의적인 격정이 넘쳤지만 12세기 중반 남송의 왕조와 사대부들이 金과의 전쟁보다는 굴욕적인 화의和議를 선택함에 따라 민족주의적 격정은 차츰 퇴조하게 되었다. 이에 다시 사대부들은 나라 걱정을 잊고 연락에 빠지게 되어 宋詞 또한 민족주의적 격정이나 남성적 결의보다는 현실안주적이고 도피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며 이는 필연적으로 퇴영적인 사풍詞風으로 귀결되었다. 사詞는 생동감을 잃고 음률과 형식에 따라 글자들을 맞추어 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사인들을 격률파(格律派)라고 부르기도 한다. 북송에 성행한 〈사〉가 남송에 들어와 형식화한 끝에 쇠미하는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책임은 〈격률파〉에게 있다 해도 좋을 것이며 대표적 작가로는 강기(姜夔1155-?), 사달조(史達祖1160-1210), 장염(張炎1248-1320?) 등이 꼽힌다.
《참고자료》
역사 따라 배우는 중국문학사 이수웅 저
중국문학사 김학주 저 신아사
중국문화와 중국문학 개관 강신웅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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