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연구목적
2. 연구 범위, 대상
3. 연구방법
Ⅱ. 본론
1-1. 사직단과 사직제도
-2. 우리나라의 사직제도
2-1. 사직단의 입지
-2. 입지선정
3-1. 영역의 구성
-2. 시설물의 배치
-3. 부속건물의 배치
4. 사직단의 예
Ⅲ. 결론
1. 결과 및 고찰
2. 나의 생각
1. 연구목적
2. 연구 범위, 대상
3. 연구방법
Ⅱ. 본론
1-1. 사직단과 사직제도
-2. 우리나라의 사직제도
2-1. 사직단의 입지
-2. 입지선정
3-1. 영역의 구성
-2. 시설물의 배치
-3. 부속건물의 배치
4. 사직단의 예
Ⅲ. 결론
1. 결과 및 고찰
2. 나의 생각
본문내용
아닌 경우가 있었다. 둘째, 다른 시설과 겹치거나 상충되어 설치하지 못한 경우인데, 서쪽에 릉·원·묘나 태실 등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시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주현사직단의 설치가 불가능한 경우와 서쪽에 있는 기존 마을이나 시장, 향교나 여단, 성문 등의 시설과 상충되어서 설치가 불가능한 경우를 볼 수 있었다. 셋째, 서쪽의 환경이 좋지 않아서 좀 더 좋은 여건을 찾아서 설치한 경우가 있었다.
주현사직단이 설치되는 곳은 그 지역의 덕망 잇는 유가와 지방관들의 가치관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최고의 제사시설이라는 사직단의 중요도에 어울리는 상징적인 장소에 설치하였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주현사직단의 위치 선정에 있어서 예제에서 규정하는 방위도 중요하지만 당시에 이미 존재하였던 토속적인 사고인, 풍수적 가치관에 맞는 적합한 지형이나 형국을 반영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곳이 굳이 서쪽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형국이나 환경만 갖추어 진다면 그곳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2) 영역의 구성
주현사직단의 영역은 사직단의 주요 시설인 제단, 그리고 유와 홍살문, 신실과 재실등의 시설물과 부속건축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고지도나 고문서에 나타나는 주현사직단의 형식은 매우 다양하다. 제단이나 건축물, 홍살문 중 하나만 설치된 사례가 있는가 하면 제단+건축물, 홍살문+건축물, 유+홍살문처럼 두 가지 시설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세 가지 시설물로 이루어져 예제에 근접한 형태로 보이는 제단+홍살문+건축물의 구주도 있었다. 제단의 개수에 있어서도 하나가 아닌 경우도 있었고, 유나 홍살문도 각각 설치된 사례에서부터, 설치된 개수와 위치가 서로 다른 사례까지 다양하다.
Ⅲ. 결론
조선과 같은 농업국가에서 토지와 곡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필요조건이었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국왕에서부터 지방 관리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이 토지와 곡식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충족되기를 서울사직단과 각 지방의 주현사직단을 통해 기원했다. 그리고 그 기원을 들어주는 사직신께 사직제를 정성껏 지냄으로써 보답했다.
조선의 사직제도에서 주목할 점으로 사직단의 입지를 생각해보았다. 중국의 문헌인 주례의 내용 중 ‘좌묘우사’와 풍수적 가치관에 따라 입지가 선정되었다. 서울사직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직단들이 이러한 예제에 따라 입지를 선정하였지만, 지방의 주현사직단은 예외인 경우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를 추구한 국가였다. 이 중앙집권 통치 국가에서 국왕의 명에 의해 세워진 지방의 주현사직단은 그 입지와 형식이 왜 달랐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본문의 내용과 같이 읍치의 서쪽에 산이나 마을이 있거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 건물들이 있었을 시에 그 입지가 달랐다고 얘기를 하지만, 왕의 명으로 세우는 사직단인데.. 라고 생각하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대에는 현대처럼 정보의 전달이 빠르고 정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성에서 멀리 있는 지방으로 갈수록 사직단에 대한 정보가 불명확해 다양한 사직단의 구성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서울사직단을 답사하기 위해 사직공원으로 찾아가기 전부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직공원은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인왕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출발지로써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나 또한 잠깐의 발걸음으로 도시에서 한적한 산으로 진입하는 듯한 느낌이 무척 새로웠다. 그런 것을 보면 서울의 명당이라는 사실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명칭부터 사직단이 아닌 사직공원이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보면서 알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사직단의 격을 낮추기 위해 공원으로 지정하고 부속건물을 대부분 철거하였으며 현재는 사직단과 관련없는 무관한 시설들이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사직단 터였던 곳에 율곡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조차 석연치 않게 보였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함께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했던 것이 사직단이다. 그러나 현재 종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머물러져 있는 상태인 것이 정말 안타깝다. 도시개발, 인도확장을 위해 사직단의 건조물을 옮기고 하는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면 안되는 뿐더러 복원에 많은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실의 조상이 숨 쉬는 종묘보다 백성의 안정을 더 크게 생각했던 조선시대처럼 국민이 주인인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사직단을 맞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주현사직단이 설치되는 곳은 그 지역의 덕망 잇는 유가와 지방관들의 가치관으로 판단해 보았을 때 최고의 제사시설이라는 사직단의 중요도에 어울리는 상징적인 장소에 설치하였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주현사직단의 위치 선정에 있어서 예제에서 규정하는 방위도 중요하지만 당시에 이미 존재하였던 토속적인 사고인, 풍수적 가치관에 맞는 적합한 지형이나 형국을 반영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 곳이 굳이 서쪽이 아니더라도 그들이 원하는 형국이나 환경만 갖추어 진다면 그곳을 선택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2) 영역의 구성
주현사직단의 영역은 사직단의 주요 시설인 제단, 그리고 유와 홍살문, 신실과 재실등의 시설물과 부속건축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고지도나 고문서에 나타나는 주현사직단의 형식은 매우 다양하다. 제단이나 건축물, 홍살문 중 하나만 설치된 사례가 있는가 하면 제단+건축물, 홍살문+건축물, 유+홍살문처럼 두 가지 시설로 이루어진 경우도 있다. 세 가지 시설물로 이루어져 예제에 근접한 형태로 보이는 제단+홍살문+건축물의 구주도 있었다. 제단의 개수에 있어서도 하나가 아닌 경우도 있었고, 유나 홍살문도 각각 설치된 사례에서부터, 설치된 개수와 위치가 서로 다른 사례까지 다양하다.
Ⅲ. 결론
조선과 같은 농업국가에서 토지와 곡식은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필요조건이었다. 따라서 한 나라의 국왕에서부터 지방 관리는 물론, 일반 백성들도 이 토지와 곡식이 편안하고 풍요롭게 충족되기를 서울사직단과 각 지방의 주현사직단을 통해 기원했다. 그리고 그 기원을 들어주는 사직신께 사직제를 정성껏 지냄으로써 보답했다.
조선의 사직제도에서 주목할 점으로 사직단의 입지를 생각해보았다. 중국의 문헌인 주례의 내용 중 ‘좌묘우사’와 풍수적 가치관에 따라 입지가 선정되었다. 서울사직단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직단들이 이러한 예제에 따라 입지를 선정하였지만, 지방의 주현사직단은 예외인 경우도 찾아 볼 수 있었다. 조선은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를 추구한 국가였다. 이 중앙집권 통치 국가에서 국왕의 명에 의해 세워진 지방의 주현사직단은 그 입지와 형식이 왜 달랐을까? 라는 의문이 생겼다. 물론 본문의 내용과 같이 읍치의 서쪽에 산이나 마을이 있거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 건물들이 있었을 시에 그 입지가 달랐다고 얘기를 하지만, 왕의 명으로 세우는 사직단인데.. 라고 생각하면서 문뜩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대에는 현대처럼 정보의 전달이 빠르고 정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한성에서 멀리 있는 지방으로 갈수록 사직단에 대한 정보가 불명확해 다양한 사직단의 구성이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서울사직단을 답사하기 위해 사직공원으로 찾아가기 전부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직공원은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인왕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출발지로써 많은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고 나 또한 잠깐의 발걸음으로 도시에서 한적한 산으로 진입하는 듯한 느낌이 무척 새로웠다. 그런 것을 보면 서울의 명당이라는 사실에 수긍이 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명칭부터 사직단이 아닌 사직공원이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보면서 알았지만, 일제강점기 때 사직단의 격을 낮추기 위해 공원으로 지정하고 부속건물을 대부분 철거하였으며 현재는 사직단과 관련없는 무관한 시설들이 많은 부분을 점유하고 있었다. 사직단 터였던 곳에 율곡이이와 신사임당의 동상조차 석연치 않게 보였다.
조선시대에는 종묘와 함께 나라를 떠받치는 기둥의 역할을 했던 것이 사직단이다. 그러나 현재 종묘는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고, 사직단은 사직공원으로 머물러져 있는 상태인 것이 정말 안타깝다. 도시개발, 인도확장을 위해 사직단의 건조물을 옮기고 하는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면 안되는 뿐더러 복원에 많은 힘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왕실의 조상이 숨 쉬는 종묘보다 백성의 안정을 더 크게 생각했던 조선시대처럼 국민이 주인인 나라인 대한민국에서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사직단을 맞길 기대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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