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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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규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시대적 배경
– 고려 무신 정권기

Ⅱ. 작가 연보 및 생애

Ⅲ. 작가의 사상

Ⅳ. 이규보의 작품
– 동국이상국집, 백운거사어록, 주뢰설, 경설, 동명왕편, 기타작품

Ⅴ. 결론

본문내용

可喜白首翁 기쁘지 않겠는가, 흰머리 늙은이가
又見今年稻穀新 또 다시 금년의 햅쌀 보게 되니
雖死無所 죽더라도 여한이 없네
東作 膏及此身 농사의 혜택이 내게까지 미침에랴.
자신을 농부의 수고로움에 혜택을 입는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부처도 못살리는 굶주린 사람을 살리는 신통력을 지닌 농민, 그 ‘위대한 농민이 지은 농사의 혜택을 입은 나’ 는 금년 햅쌀을 보았으니 죽어도 부족할 것이 없다는 이 시는, 당시가 ‘불교를 국가적 신앙’으로 삼고 있던 때임을 생각할 때 신랄한 비판인 동시에 농민의 존재에 대해 생활 현실의 구체적 상황으로 그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농부를 부처처럼 공경’하는 마음으로 하염없는 은혜에 감사드리고 있다. 이규보는 어느덧 관인 보다는 농민의 입장에 밀착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각성은 관인으로서의 사명을 완수하는데 정도를 걷지 못한 자책감과 우울이 밑거름이 되었을 터이다. 즉 고려 왕실을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 최씨 정권의 권력 구조 속에서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재상으로서 했던 일이란 문필력으로 허수아비처럼 최씨 정권의 무제한 적 권력을 찬미해야 했던 것이다. 이상적 관인의 모습을 이루는 데는 실패를 자인했지만, 만년에까지도 시에다 진실을 담아내려는 그의 노력은 생을 마칠 때 까지 계속되었다.
▶ 8월 5일에 도적떼가 점점 치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群盜如蝟毛 군도여위모 '도적떼가 고슴도치 털처럼 모여,
生民灑腥血 생민쇄성혈 생민이 비린 피를 뿌리누나
郡守徒戎衣 군수도융의 군수는 한갓 융의만 입고서,
望敵氣先奪 망적기선탈 적을 바라보곤 기가 먼저 꺾이네
尙未掃蜂毒 상미소봉독 벌의 독도 아직 소탕하지 못했는데,
況堪探虎穴 황감탐호혈 하물며 호랑이 굴을 더듬을 수 있으랴
嗟哉時無人 차재시무인 슬프다 이런 때에 훌륭한 사람 없으니,
誰繼來嚼鐵 수계래작철 누가 대신하여 와서 쇠를 씹을꼬
賊臂捷於猿 적비첩어원 적의 팔은 원숭이보다 빨라,
放箭若星瞥 방전약성별 활쏘기를 별이 반짝이듯 하고
賊脛迅於鹿 적경신어록 적의 정강이는 사슴보다 빨라,
越山如電滅 월산여전멸 산 넘기를 번갯불 사라지듯 하는구려
士卒追不及 사졸추불급 사졸들이 추격하여도 미치지 못하여,
聚首空 취수공하돌 머리를 모아 부질없이 입만 벌리고 탄식하네
幸能觸其鋒 행능촉기봉 어쩌다가 그 칼날에 부닥치면,
物故十七八 물고십칠팔 열에 칠팔은 죽는구려
1231년 몽고의 1차 칩입이 시작되고 기마민족으로 전쟁에 익숙하게 단련된 몽고군의 군대 아래 고려의 군사와 백성의 희생이 컸었다. 「8월 5일에 도적떼가 점점 치성한다는 소식을 듣고」에서 이규보는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국가가 어려움에 닥친 상황이었거만 무신 권련 지배층인 최씨나 그 주변 세력들의 부귀 호사는 가문의 융성에만 정신이 팔려 향락에 빠져 있었다. 이규보는 관인의 한 사람으로서는 비록 현실에 타협는 일면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시인으로서의 양심을 잃지는 않았음을 짐작한다.
▶ 농부를 대신하여
비를 맞음 밭이랑에 엎드려 김을 매니
검고 추악한 몰골 사람의 형용이 아니다만
왕손 공자여, 나를 업신여기지 마라
그대들 부귀호사도 모두 나로부터 나오나니
새 곡식 아직도 퍼런 채 밭에 있는데
현관서리는 벌써 조세를 조르네
힘껏 일하여 부국함이 우리들에게 달렸거늘
어찌 이다지도 괴롭히며 살을 벗겨 가는가.
이규보는 젊은 시절의 포부였던 ‘왕을 도와 나라를 경영하고 문장으로 나라의 문화를 빛내는 것’이엇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다고 자책하였다. 고려 왕실을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린 최씨 정권의 권력 구조 속에서 의견을 개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그가 재상으로서 했던 일이란 갈고 닦은 문필력으로 허수아비처럼 최씨 정권의 무제한적 권력을 찬미해야 했던 것이다. 최씨 정권은 처음엔 ‘국난 극복’이란 명분을 내걸었지만 긴장감이 풀어져 반민중적, 몰애국적으로 타락해 애꿎은 민중들만 착취했다. 이를 지켜보는 이규보는 그들을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에게 초라함을 느꼈다. 농민의 수고에 신세를 지는 무능력하고 기생적인 관인의 목소리로, 현실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시인의 음성으로, 농민을 대변하는 목소리로 표출 되고 있다.
Ⅴ. 결론
이규보는 무인 집권기에 재상직을 지낸 이례적인 인물로 시인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시풍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벼슬에 임명 될 때 마다 읊었던 즉흥시들은 유명하다. 신라시대 때는 최치원, 조선시대 때는 박지원이라면 이규보는 고려시대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최씨 무인 정권에 아부하며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했던 모습에 상반되는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다. =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가엽게 여겨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시대가 얼마나 난세였던가를 역사를 통해 집작할 수 있다. 그는 말 한마디 자유롭게 하기 무서운 세상에서 살았다. 문필로 나라에 충성하려는 포부를 지녔지만 노년에 이르러 비록 뜻대로 이루지 못해 자책하였다고 한다. 시인으로서의 포부는 남달랐지만 그도 한때는 편안한 자리를 탐내고 출세를 꿈꾸는 평범한 벼슬아치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문필에 대한 천부적 재능과 자유분방한 기질로 양심을 지키려는 시인으로 거듭나게 했다.
그의 시편들 가운데 현실과 타협한 시도 많고 한편으로는 현실에 올바르게 대처하려는 양심적 관인의 모습, 농민의 삶의 고통과 상처, 피지배층의 상처를 통하여 본 지배층에 비정함 등을 표현한 작품도 다수다. 특히 농민에 대해 읊은 시 동명왕편과 같이 그의 문학은 우리의 문학사에 중요한 양분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있다.
* 참고 문헌
고미숙 외 18명, 한국 고전문학 작가론, 소명출판, 2006.
김상훈, 동명왕의 노래, 보리, 2005.
양희찬 외 2명, 우리 옛 문학의 길눈눈길, 보고사, 2010.
정연정, 이규보와 최승호의 시세계 비교 연구 : 불교생태론적 관점을 중심으로, 2010.
네이버 -문화인물 이규보
http://blog.naver.com/osj1952?Redirect=Log&logNo=100008663977
http://cafe.naver.com/kangbukvitaedu/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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