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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음
본문내용
이러한 원초적 신앙의 합리화 과정일 뿐이다.
D.
이제 우리는 시간성에 대하여 우리가 앞서, 예를 들면 성과 공간성에 대하여 말했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즉 실존의 외적 또는 우연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실존이 무엇이든-공간적ㆍ성적ㆍ시간적이든-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속성들’을 인수하고 부담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속성들을 자신의 존재의 차원들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 무엇일 수 없고, 그리하여 그 속성들 하나하나에 대한 명확한 분석은 사실상 주체성 자체에 관계한다. 지배적 문제들과 종속된 문제들은 없다. 모든 문제들이 중심을 같이 한다. 시간을 분석하는 것은 주체성에 대한 미리 확립된 개념으로부터 결과들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주체성의 구체적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를 이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 순수한 형식에서가 아니라, 그 차원들의 교차점에서 주체를 추구함으로써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 자체를 고발해야 한다.
.. 현재를 존재로 이르게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며 미래를 존재로 이르게 하는 것은 현재가 아니다. 미래는 관찰자의 배후에서 준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평에 있는 폭풍처럼 관찰자 앞에서 자신을 밀리 계획한다. 배를 탄 관찰자가 물줄기를 따라간다면 사람들은 그 흐름과 함께 자신의 미래를 향해 움직인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으나, 그 미래는 강어귀에서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풍경이고, 시간의 흐름은 더 이상 시냇물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풍경들이 움직이는 관찰자에 대하여 펼쳐짐이다. 따라서 시간은 내가 기록하는 데 만족하는 실재적 과정, 실제적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과 나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사물들 자체에 있어서 미래와 과거는 일종의 선존재, 일종의 영원한 잔존에 있다.
E.
그것은 넓은 의미의 나의 ‘현전의 장’에 있다. 즉 흘러가는 하루 중에 내가 작업하면서 보내어 내가 뒤로 처지는, 그러나 저녁과 밤보다는 앞에 있게 되는 그 순간이다. 내가 시간과 접촉하기 시작하고 시간의 흐름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다. 보다 멀리 있는 과거는 역시 자신의 시간적 질서를 가지고 나의 현재와의 관계에서 시간적 위치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과거와 현존했던 한에서, 나의 삶에 의해 횡단된 ‘자신의 시간에’ 있었던 한에서, 나의 삶이 지금까지 따라왔던 한에서이다. 내가 먼 과거를 불러낸다면 나는 시간을 다시 여는 셈이고, 그것이 지금은 닫혀 있는 미래의 지평을, 지금은 멀리 있는 직전의 과거의 지평을 포함하는 순간에 다시 자리하는 셈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나를 시간과 그 차원들이 끼어들 거리 없이 궁극적 명증성을 가진 채 몸소 나타나는 발원적 경험으로서의 현전의 장으로 돌려보낸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미래가 현재와 과거로 미끄러져가는 것을 보는 곳이다. 이 세 차원들은 분리된 행동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하루를 마음속에 그리지 않으나 그것은 자신의 무게를 가지고 나를 힘주어 누르고 여전히 거기에 있다. 나는 어떤 세목도 불러내지 않으나 곧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으며, 나는 나의 하루를 ‘여전히 나의 손아귀에’ 쥐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추측과 몽상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지각하는 것 앞에는 틀림없이 가시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의 세계가, 미리 적어도 올 것(우리가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는 것을 죽는 날까지 언제나 틀림없이 기대할지라도)의 방식을 그리는 지향적 행렬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다. 현재 자체는 (좁은 의미에서) 정립되지 않는다. 종이, 나의 만년필은 나의 거기에 있으나, 나는 그것들을 명시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대상들을 지각하기보다 주위와 함께 계산하고 있다. 나는 나의 과제 앞에 있다기보다는 나의 연장에 기대어 있고 나의 과제에 속해 있다.. 시간은 줄이 아니라 지향성들의 망이다.
F.
따라서 과거는 과거이다가 아니고, 미래는 미래이다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이 즉자 존재의 충만성을 부수려고 하고, 그 조망을 설계하려고 하며, 그 비존재를 도입하려고 할 때만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내가 그것들을 향해 뻗칠 때 솟아오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다. 나는 그 정도로 역시 오늘 아침이나 곧 올 밤에 있다. 나의 현재는 과연 이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그 정도로 오늘, 올해, 나의 모든 삶이다. 순간을 외부에서 단 하나의 시간에 결합하는 종합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순간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순간의 열린 연속을 포함했고, 내부적으로 상호 의사 소통했기 때문이며, ‘삶의 응집’은 자신의 탈자성과 함께 주어지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다른 현재에로의 이행을 나는 사고하지 않는다.
G.
그것들은 그 전체적 시간 의식의 시초적 애매성을 표현한다. 보유한다 함은 잡는다는 것인데, 그러나 거리를 두고 잡는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간의 ‘종합’은 전이의 종합이고 자신을 전개하는 삶의 운동이다. 그 삶을 체험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실현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시간의 장소는 없다. 자신을 운반하고 되받는 것은 시간 자신이다.. 영원성이 뿌리를 가지는 그 각성의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넓은 의미의 현전의 장, 즉 발원적 과거와 미래의 이중 지평을 가진 현전의 장, 그리고 기한이 찬 또는 가능한 현전의 장들의 열린 무한정이다. 나에 대하여 시간이 있는 것은 내가 시간에 위치지어지기 때문일 뿐이고, 말하자면 내가 이미 시간에 참여한 것으로 발견하기 때문일 뿐이고, 모든 존재가 나에게 몸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뿐이며, 결국 존재의 일부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내 앞에서 그림을 형성하지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 대하여 시간이 있는 것은 내가 현재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순간이 말소될 수 없는 개별성, ‘이번만’을 획득하는 것은 현재로 됨으로써이고, 이어서 이 개별성, 이 ‘이번만’으로 인해 그 순간은 곧이어 시간을 가로지를 수 있고 우리에게 영원성의 환상을 줄 수 있다. 시간의 차원들의 어느 것도 다른 것에서 연역될 수 없다.
D.
이제 우리는 시간성에 대하여 우리가 앞서, 예를 들면 성과 공간성에 대하여 말했던 것을 말할 수 있다. 즉 실존의 외적 또는 우연적 속성을 가질 수 없다. 실존이 무엇이든-공간적ㆍ성적ㆍ시간적이든-간에 그것은 전적으로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속성들’을 인수하고 부담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그 속성들을 자신의 존재의 차원들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 무엇일 수 없고, 그리하여 그 속성들 하나하나에 대한 명확한 분석은 사실상 주체성 자체에 관계한다. 지배적 문제들과 종속된 문제들은 없다. 모든 문제들이 중심을 같이 한다. 시간을 분석하는 것은 주체성에 대한 미리 확립된 개념으로부터 결과들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을 통해서 주체성의 구체적 구조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체를 이해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은 그 순수한 형식에서가 아니라, 그 차원들의 교차점에서 주체를 추구함으로써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간 자체를 고발해야 한다.
.. 현재를 존재로 이르게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며 미래를 존재로 이르게 하는 것은 현재가 아니다. 미래는 관찰자의 배후에서 준비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평에 있는 폭풍처럼 관찰자 앞에서 자신을 밀리 계획한다. 배를 탄 관찰자가 물줄기를 따라간다면 사람들은 그 흐름과 함께 자신의 미래를 향해 움직인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으나, 그 미래는 강어귀에서 그를 기다리는 새로운 풍경이고, 시간의 흐름은 더 이상 시냇물 자체는 아니다. 그것은 풍경들이 움직이는 관찰자에 대하여 펼쳐짐이다. 따라서 시간은 내가 기록하는 데 만족하는 실재적 과정, 실제적 연속이 아니다. 그것은 사물들과 나의 관계에서 탄생한다. 사물들 자체에 있어서 미래와 과거는 일종의 선존재, 일종의 영원한 잔존에 있다.
E.
그것은 넓은 의미의 나의 ‘현전의 장’에 있다. 즉 흘러가는 하루 중에 내가 작업하면서 보내어 내가 뒤로 처지는, 그러나 저녁과 밤보다는 앞에 있게 되는 그 순간이다. 내가 시간과 접촉하기 시작하고 시간의 흐름을 알게 되는 그 순간이다. 보다 멀리 있는 과거는 역시 자신의 시간적 질서를 가지고 나의 현재와의 관계에서 시간적 위치를 가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과거와 현존했던 한에서, 나의 삶에 의해 횡단된 ‘자신의 시간에’ 있었던 한에서, 나의 삶이 지금까지 따라왔던 한에서이다. 내가 먼 과거를 불러낸다면 나는 시간을 다시 여는 셈이고, 그것이 지금은 닫혀 있는 미래의 지평을, 지금은 멀리 있는 직전의 과거의 지평을 포함하는 순간에 다시 자리하는 셈이다. 따라서 모든 것은 나를 시간과 그 차원들이 끼어들 거리 없이 궁극적 명증성을 가진 채 몸소 나타나는 발원적 경험으로서의 현전의 장으로 돌려보낸다. 바로 여기가 우리가, 미래가 현재와 과거로 미끄러져가는 것을 보는 곳이다. 이 세 차원들은 분리된 행동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나는 나의 하루를 마음속에 그리지 않으나 그것은 자신의 무게를 가지고 나를 힘주어 누르고 여전히 거기에 있다. 나는 어떤 세목도 불러내지 않으나 곧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 있으며, 나는 나의 하루를 ‘여전히 나의 손아귀에’ 쥐고 있다.. 우리의 미래는 추측과 몽상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 지각하는 것 앞에는 틀림없이 가시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나의 세계가, 미리 적어도 올 것(우리가 다른 어떤 것이 나타나는 것을 죽는 날까지 언제나 틀림없이 기대할지라도)의 방식을 그리는 지향적 행렬에 의해서 지속되고 있다. 현재 자체는 (좁은 의미에서) 정립되지 않는다. 종이, 나의 만년필은 나의 거기에 있으나, 나는 그것들을 명시적으로 지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 대상들을 지각하기보다 주위와 함께 계산하고 있다. 나는 나의 과제 앞에 있다기보다는 나의 연장에 기대어 있고 나의 과제에 속해 있다.. 시간은 줄이 아니라 지향성들의 망이다.
F.
따라서 과거는 과거이다가 아니고, 미래는 미래이다가 아니다. 그것은 주체성이 즉자 존재의 충만성을 부수려고 하고, 그 조망을 설계하려고 하며, 그 비존재를 도입하려고 할 때만 존재한다. 과거와 미래는 내가 그것들을 향해 뻗칠 때 솟아오른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지금 이 순간에 있지 않다. 나는 그 정도로 역시 오늘 아침이나 곧 올 밤에 있다. 나의 현재는 과연 이 순간이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그 정도로 오늘, 올해, 나의 모든 삶이다. 순간을 외부에서 단 하나의 시간에 결합하는 종합은 필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순간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넘어 다른 순간의 열린 연속을 포함했고, 내부적으로 상호 의사 소통했기 때문이며, ‘삶의 응집’은 자신의 탈자성과 함께 주어지기 때문이다. 현재에서 다른 현재에로의 이행을 나는 사고하지 않는다.
G.
그것들은 그 전체적 시간 의식의 시초적 애매성을 표현한다. 보유한다 함은 잡는다는 것인데, 그러나 거리를 두고 잡는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간의 ‘종합’은 전이의 종합이고 자신을 전개하는 삶의 운동이다. 그 삶을 체험하는 것 이외에 그것을 실현하는 다른 방법은 없다. 시간의 장소는 없다. 자신을 운반하고 되받는 것은 시간 자신이다.. 영원성이 뿌리를 가지는 그 각성의 시간이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넓은 의미의 현전의 장, 즉 발원적 과거와 미래의 이중 지평을 가진 현전의 장, 그리고 기한이 찬 또는 가능한 현전의 장들의 열린 무한정이다. 나에 대하여 시간이 있는 것은 내가 시간에 위치지어지기 때문일 뿐이고, 말하자면 내가 이미 시간에 참여한 것으로 발견하기 때문일 뿐이고, 모든 존재가 나에게 몸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뿐이며, 결국 존재의 일부가 나에게 너무 가까이 있어서 내 앞에서 그림을 형성하지도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에 대하여 시간이 있는 것은 내가 현재를 가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순간이 말소될 수 없는 개별성, ‘이번만’을 획득하는 것은 현재로 됨으로써이고, 이어서 이 개별성, 이 ‘이번만’으로 인해 그 순간은 곧이어 시간을 가로지를 수 있고 우리에게 영원성의 환상을 줄 수 있다. 시간의 차원들의 어느 것도 다른 것에서 연역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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