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머리말
2. 1920년대 학생운동의 배경(시대상황)과 학생운동의 변모
3.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발단
4.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전개과정
1) 광주학생운동의 발발
(1) 광주지방에서의 비합법 학생조직의 결성
(2) 1929년 11월 이전의 맹휴투쟁
(3) 1929년 11월 광주 및 전남에서의 학생투쟁
2) 1929년 12월 서울 및 전국 대도시에서의 학생투쟁
3) 1930년 1월부터 4월 사이 전국 각지에서의 학생투쟁
5.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장과 결과 및 의의
1)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장
2)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결과
3)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의의
6. 맺음말
참고문헌
2. 1920년대 학생운동의 배경(시대상황)과 학생운동의 변모
3.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발단
4.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전개과정
1) 광주학생운동의 발발
(1) 광주지방에서의 비합법 학생조직의 결성
(2) 1929년 11월 이전의 맹휴투쟁
(3) 1929년 11월 광주 및 전남에서의 학생투쟁
2) 1929년 12월 서울 및 전국 대도시에서의 학생투쟁
3) 1930년 1월부터 4월 사이 전국 각지에서의 학생투쟁
5.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장과 결과 및 의의
1)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장
2)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결과
3)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의의
6.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의 목포, 나주, 함평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어 12월에는 서울 학생들이 대대적인 투쟁에 돌입하였다. 당황한 일제는 겨울 방학을 앞당겨 실시함으로써 투쟁의 열기를 잠재우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항일 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번지는 계기가 되었다.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간 학생들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의 소식을 전국으로 퍼뜨렸다. 그 결과 학생 투쟁이 들불처럼 전국 각지로 확대되었다.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7~238쪽.
광주학생 운동을 전국에 알린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즉각적으로 광주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 다음 서울에서 진상보고회를 개최하고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으나 신간회의 민중대회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열려고 계획했던 신간회 본부를 경찰이 급습하여 각종 인쇄물을 압수하고 홍명희 권동진 조병옥 김동삼 등 신간회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여 대회를 사전에 원천봉쇄한 것이었다.
이 일로 신간회는 붕괴의 위기로까지 갔다가 체제를 개편하여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신간회의 간부들이 우익에 편중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좌익세력에 의해 1931년 결국 해체되었다.
한편, 학생운동이 전국에 확산되자 일제는 사태의 진압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신간회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고 간부들을 체포하였으며 보도를 금지하는 등 학생운동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박문영,김경찬,『단숨에 읽는 한국사 이야기』, 동해, 1998, 400~401쪽.
위-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충돌사건을 보도한
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아래 - 광주학생운동을 왜곡보도할 일제기관지
광주일보 규탄 시위, 1929년 11월 3일
3)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의의
광주학생운동은 3·1 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 몇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는 학생 운동이 종래의 동맹휴학에서 가두시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물론 6 10 만세운동 때에도 가두시위가 전개되었으나, 광주학생항일운동처럼 광범위한 학생 대중이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둘째는 투쟁 구호가 운동 초기의 “조선인 본위 교육 실시”, “ 검거된 학생 즉각 석방”에서 점차 “일본 제국주의 타도하자!” “피억압 민족 해방 만세!” 등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20년대 후반 학생 운동의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는 원산 총파업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의 대중 투쟁의 열기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대중적 항일 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김인기조왕호,『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두리미디어, 2006, 186~187쪽.
셋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인 학생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도시에는 조선인 중등학교인 고등 보통 학교와 일본인 학교인 중등학교가 병존하고 있었다. 이 두 학교 학생 등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독 광주 고보 학생들과 광주 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광주 전역의 시위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광주 지역에 학생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에서는 1926년에 성진회라는 학생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성진회가 해산된 이후, 1929년에는 각 학교의 학생 운동 세력을 결집한 독서회 중앙본부라는 조직이 있었다. 독서회 중앙 본부는 나주에서 통학 열차 사건이 터지자, 학생들의 울분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만들고 시위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서울의 여러 청년 운동 조직과 당시 전국적인 통일 전선 조직인 신간회(新幹會), 여성 조직인 근우회(槿友會) 등이 각 지부를 통해서 광주 학생들의 항일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 시켰다.
이처럼 학생들 간의 사소한 충돌이 전국적인 항일 학생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여러 단체의 조직적인 지원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6~237쪽.
6. 맺음말
일제 식민지시기에 줄기차게 이어진 민족 해방 운동에서 언제나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청년 학생층이었다. 2 8 독립 선언을 비롯하여 3 1운동, 6 10만세 운동에서 청년 학생들은 반일 운동의 선두에서 싸웠다. 그렇지만 항일 학생 운동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타오른 것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한 일 학생간의 싸움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항일 학생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1쪽.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참여해서 투철한 항일 정신을 보여 준 본격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31운동을 겪으면서 수많은 민족 운동가가 각성되었고 그들이 1920년대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각성시키면서 1930~1940년대, 더 나아가서는 해방 이후 건국 운동을 이끌어 갈 많은 인물을 키워 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한국 민족 해방 운동사에서 31운동, 610만세 운동과 더불어 3대 민족 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그리고 지금도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서 그 날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기념하고 있다.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9쪽.
참고문헌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동녘, 2003.
고준환,『하나되는 한국사』, 한국교육진흥재단, 2002.
김인기조왕호,『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두리미디어, 2006.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 1995.
박문영,김경찬,『단숨에 읽는 한국사 이야기』,동해, 1998.
광주학생 운동을 전국에 알린 신간회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즉각적으로 광주에 조사단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 다음 서울에서 진상보고회를 개최하고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하였으나 신간회의 민중대회는 불발로 끝나고 말았다.
광주학생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9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열려고 계획했던 신간회 본부를 경찰이 급습하여 각종 인쇄물을 압수하고 홍명희 권동진 조병옥 김동삼 등 신간회 간부 20여 명을 체포하여 대회를 사전에 원천봉쇄한 것이었다.
이 일로 신간회는 붕괴의 위기로까지 갔다가 체제를 개편하여 다시 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신간회의 간부들이 우익에 편중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좌익세력에 의해 1931년 결국 해체되었다.
한편, 학생운동이 전국에 확산되자 일제는 사태의 진압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신간회의 활동을 원천봉쇄하고 간부들을 체포하였으며 보도를 금지하는 등 학생운동이 더 이상 확대되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박문영,김경찬,『단숨에 읽는 한국사 이야기』, 동해, 1998, 400~401쪽.
위- 광주고보와 광주중학교 충돌사건을 보도한
1929년 11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
아래 - 광주학생운동을 왜곡보도할 일제기관지
광주일보 규탄 시위, 1929년 11월 3일
3) 광주학생 항일 운동의 의의
광주학생운동은 3·1 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 민족 운동으로서 몇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는 학생 운동이 종래의 동맹휴학에서 가두시위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물론 6 10 만세운동 때에도 가두시위가 전개되었으나, 광주학생항일운동처럼 광범위한 학생 대중이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둘째는 투쟁 구호가 운동 초기의 “조선인 본위 교육 실시”, “ 검거된 학생 즉각 석방”에서 점차 “일본 제국주의 타도하자!” “피억압 민족 해방 만세!” 등 일제의 식민 통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으로 바뀌어 갔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변화는 1920년대 후반 학생 운동의 역량이 크게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는 원산 총파업을 비롯하여 노동자 농민의 대중 투쟁의 열기가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대중적 항일 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김인기조왕호,『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두리미디어, 2006, 186~187쪽.
셋째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인 학생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는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도시에는 조선인 중등학교인 고등 보통 학교와 일본인 학교인 중등학교가 병존하고 있었다. 이 두 학교 학생 등 사이에 사소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유독 광주 고보 학생들과 광주 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광주 전역의 시위로 이어질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광주 지역에 학생운동을 지도할 수 있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광주에서는 1926년에 성진회라는 학생 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성진회가 해산된 이후, 1929년에는 각 학교의 학생 운동 세력을 결집한 독서회 중앙본부라는 조직이 있었다. 독서회 중앙 본부는 나주에서 통학 열차 사건이 터지자, 학생들의 울분을 조직적으로 확산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서 학생 투쟁 지도 본부를 만들고 시위운동을 이끌었다. 그리고 서울의 여러 청년 운동 조직과 당시 전국적인 통일 전선 조직인 신간회(新幹會), 여성 조직인 근우회(槿友會) 등이 각 지부를 통해서 광주 학생들의 항일 운동을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확산 시켰다.
이처럼 학생들 간의 사소한 충돌이 전국적인 항일 학생 운동으로 발전한 것은 여러 단체의 조직적인 지원과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6~237쪽.
6. 맺음말
일제 식민지시기에 줄기차게 이어진 민족 해방 운동에서 언제나 주요한 역할을 한 것은 청년 학생층이었다. 2 8 독립 선언을 비롯하여 3 1운동, 6 10만세 운동에서 청년 학생들은 반일 운동의 선두에서 싸웠다. 그렇지만 항일 학생 운동의 불꽃이 본격적으로 타오른 것은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었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한 일 학생간의 싸움에서 시작되어 전국적인 항일 학생 운동으로 번져 나갔다.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1쪽.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참여해서 투철한 항일 정신을 보여 준 본격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었다. 31운동을 겪으면서 수많은 민족 운동가가 각성되었고 그들이 1920년대 민족 운동을 이끌었다면,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전국적으로 학생들을 각성시키면서 1930~1940년대, 더 나아가서는 해방 이후 건국 운동을 이끌어 갈 많은 인물을 키워 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한국 민족 해방 운동사에서 31운동, 610만세 운동과 더불어 3대 민족 운동의 하나로 평가된다. 그리고 지금도 매년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정해서 그 날의 항일 정신과 독립 의지를 기념하고 있다.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 동녘, 2003, 239쪽.
참고문헌
박한용장원정황경,『시와 이야기가 있는 우리역사』,동녘, 2003.
고준환,『하나되는 한국사』, 한국교육진흥재단, 2002.
김인기조왕호,『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두리미디어, 2006.
한국역사연구회 근현대청년운동사 연구반,『한국 근현대 청년운동사』, 1995.
박문영,김경찬,『단숨에 읽는 한국사 이야기』,동해,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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