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1910년대~1920년의 농민운동 - 농민운동 전개의 배경, 소작쟁의와 수리조합반대투쟁, 1920년대 농민조합운동,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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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1910년대~1920년의 농민운동 - 농민운동 전개의 배경, 소작쟁의와 수리조합반대투쟁, 1920년대 농민조합운동,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농민운동 전개의 배경
  (1) 농업정책과 식민지 지주제
  (2) 농촌 통제 정책
 2) 소작쟁의와 수리조합반대투쟁
  (1) 소작쟁의
  (2) 소작조합 등 농업정책 반대투쟁
 3) 1920년대 농민조합운동
  (1) 소작인조합운동 (1919~1926년)
  (2) 합법 농민조합운동(1920년대만)
 4) 1910년부터 1920년대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3.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한 계시였다. 경찰측의 집계에 의하면 1926년 말 현재 무려 338개의 사상단체가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20년대 초반의 소작인 단체들은 몇몇의 경우를 제화하고는 농사개량, 소작관계 새선, 소작인과 지주의 공존공용, 생활개선 들을 표방하는 지주와 소작인들의 상조단체에 불과했다. 예컨대 군 권업과장과 경찰서장이 창립대회에서 축사를 하는 등 각지의 소작인조합이 1924년경까지 총독부권력측과 비교적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운동의 이 같은 개량성 때문이었다.
또한 당시 소작인 조합의 요구는 대단히 타협적, 절충적인 것이었던 까닭에 총독부측은 물론이고 군단위 지주회고 이를 쉽게 수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령, 거의 같은 시기에 채택된 나주군 반남면 소작인회의 소작관계요구와, 나주군 지주회의 소작관계 경의를 비교해 보면, ‘소작료 5할’, ‘작권이동 금지’, ‘공편한 두량의 실시’, ‘지세공과금 지주부담’등으로 별다른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고, 조직적인 소작쟁의가 소작인조합의 주도로 격렬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소작인조합운동의 성격은 점차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특히 사회운동의 방향전환 논쟁과정에서 조선농민총동맹이 결성되고, 또 각지의 소작인 조합이 합법 농민조합으로 개편되면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2) 합법 농민조합운동(1920년대만)
조선농민총동맹(1927년 9월~ 1935년 6월)은 창립 이후 중안 간부진의 파벌투쟁, 개량적인 지도노선, 일제의 탄압 등으로 농민운동의 전국적 지도조직으로서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농민총동맹의 군, 면 단위 농민조합들은 농민운동, 더 나아가 지역사회운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신문보도에 근거한 집계이긴 하나 창립 이후부터 1931년에 걸쳐 있는 시기에 조직된 92개 농민조합의 지역별 분포를 보면 강원 1개, 경기 2개, 경만 24개, 경북 10개, 전남 17개, 전북 10개, 충남 3개, 충북 3개, 평남 3개, 평북 1개, 함남 11개 함북 2개, 황해 5개 등이었음이 확인된다. 합법 농민조합이 존재한 전체 67개 군도 가운데 군단위 농민조합이 활동하고 있었던 지역은 44개이고, 3년 이상 활동한 농민조합이 있었던 지역은 28개였다 지금까지 확인된 몇몇 사료에 의거하면 조선농민총동맹의 산하조직규모는 ① 1927년 9월 분립시기 - 가맹단체 134개, ② 1928년 말 - 가맹단체 200여개, ③ 1931년 말 현재 - 46개의 산하조직, ④ 1933년 말 - 가맹단체 35개, 회원 3만 3,897명이었다.
1920년대 후반기 합법 농민조합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군단위의 농민조합(지부연합조직), 면단위의 지부조직, 동리단위의 반조직으로 구성된 합법적인 대중조기이었으며, 이러한 조직을 통해 가각의 농민조합은 소작관계개선, 야학, 생활새선 등 농민계몽, 그리고 수리조합, 양잠장려, 삼림조합설치 등 농업전책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이준식, 「일제침략기 농민운동의 이념과 조직 - 함경남도 평지대의 경우」, 1991. 연세대 사회학과 박사학위논문참조
하지만 1920년대 후반기의 합법 농민조합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 소작인조합운동보다도 오히려 저조했다. 이는 『동아일보』와『조선일보』의 농민운동 관련기사를 개관해 보아도 확인된다. 1920년대 후반 신문에 보도된 사회운동 관련기사는 대부분 신간회나 청년총동맹의 지부활동에 관한 것들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합법 농민조합이 거의 유명무실할 상태였음을 반증한다. 당시 조선공산당과 조선농민총동맹은 합법 농민조합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는 것은 고사하고 고양일로를 걷던 노동자, 농민들의 계급투쟁을 신간회운동에 종속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의 합법칙적인 발전을 오히려 방해했다. 신간회 해소논쟁과정에서 해소론자들이 비판한 것처럼, 1930년을 전후나 시기의 민중투쟁에 대한 신간회는 “대책강구를 결의하고, 조사위원을 파견하여 조사보고를 지회에 전령하는” 활동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합법 농민 조합운동은 1930년대 접어들면서 소작쟁의와 농업정택 반대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또 신간회 및 청년총동맹의 해소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4) 1910년부터 1920년대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일제하의 농민운동은 여러 가지 한계와 오류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3.1운동 이후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일련의 발전과정을 거듭했다. 이런 농민운동의 발전은 이후로도 계속 농민들의 권익향상과 생활개선을 위한 방편으로 쓰였다. 현재에 와서 농민운동은 정치적인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가 만나 농민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권리를 향상시키거나 지킨다. 거기다 농민뿐만 아니라 농민이 아닌 소비자들까지 참여한다는 점에서 현재의 농민운동은 많이 발전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초기의 일제하의 농민운동은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목적과 소수의 사람들이 분산적으로 운동을 했으나 점점 발전해 가면서 집단적, 정치적으로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농민이 스스로의 권리를 지키고 향상시키기 위하여 운동을 하였다는 점과 반일투쟁이었다는 점, 농민이 주체적으로 조합을 형성했다는 점 등이다.
3. 결론
농민운동은 일제치하전서부터 쭉 일어났었다. 이는 한국이 농경국가였기 때문이다. 동학농민운동 같은 큼직한 농민운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민들은 언제나 새로운 세상을 바랐다. 그러나 지금 현재까지도 농민들이 바란 새로운 세상은 오지 않은 듯싶다. 농민운동은 계속 지속될 것이고 지속되어 가면서 발전할 것이다. 농업이 발전하고 농민이 대우받는 세상, 농민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법적 마련이 되어있는 세상. 어쩌면 농민들이 바라는 세상은 그런 것이 아닐까.
참고문헌
강만길외 11명 , 『한국사14』, 한길사 , 1995
오영찬외 6명 , 『눈으로 보는 한국 역사 13 - 민족 수난기1』, 교원 , 1998
조동걸 , 『일제하 한국농민운동사』, 한길사 , 1976
강만길외 11명 , 『한국사15』, 한길사 , 1995
망원한국사연구실편 『한국근대민중운동사』 돌베게, 1989
반민족문제연구소『친일파 99인 2』 돌베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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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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