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종사관]종군위안부(위안부)의 개념, 일본군 위안부와 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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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안부 종사관]종군위안부(위안부)의 개념, 일본군 위안부와 위안소,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종군위안부(위안부)란?
1) 정신대와 종군위안부의 차이점
2) 일본군 위안부의 동시와 시기 및 장소
(1) 동기
(2) 시기
(3) 장소

2. 위안소
1) 위안소
2)‘위안부’가 된 여성들
3) 위안부의 생활
4) 전 ‘위안부’ 의 전후

3.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나눔의 집> 『박두리 할머니』
1) 가정배경
2) 대만으로
3) 패전 후

참고문헌

본문내용

내가 고향에서 살 때 남자 3명이 우리 마을에서 여자 10명가량을 모집했다. 일본공장에 넣어준다고 했다. 1940년 晩春이 아니었다. 대만에 갈 때와 귀국할 때 배를 탔으나 배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배가 컸고 군인들과 민간인이 많이 타고 있었다는 것만을 안다. 대만까지 가는 동안 바람이 심했고 우리들은 멀미를 몹시하고 토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붙이는 약과 먹는 약을 많이 샀다. 대만 어느 항구엔가 도착했을 때 우리를 차에 싣고 어디론가 갔는데 그 지명을 나는 모른다. 그곳에 도착해서 일주일인가 며칠이 지났을 때 군인들이 마구 오기 시작했다. 공장에는 보내지 않고 손님을 받으라고 했다. 우리는 전부 놀랐다. 글도 모르고 길도 몰라서 도망할 수 없었다.
군대식으로 한사람이 잘못하면 전부가 몽둥이로 구타당했다. 지금 머리와 다리를 못쓰는 이유가 그때의 구타당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때는 쌀이 구해서 밥을 제대로 주지 않아 굶기도 했다. 사서 먹으라니 돈이 없었다. 또한 자유롭게 외출할 수도 없었다. 위안소에 있던 여자들은 전부 미혼녀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본말을 해야했다. 우리가 있던 위안소에서는 군인이 제마음에 드는 여자를 데리고 각 위안부가 차지하고 있는 방으로 갔다. 잠시 있다 가는 사람과 하루 밤을 자고 가는 사람이 있었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내는 돈이 다르다는데 나는 얼마씩 내는지 모른다. 주인 밑에 관리인이 있어서 그가 돈을 받았다. 그는 또한 우리를 관리하고 식사문제도 관리했다. 식사는 하루에 두끼였다.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외출을 할 수 없었고 돈도 없었다. 긴밤을 자는 사람이 주는 팁으로는 화장품과 옷을 사야 했다. 이런 심부름도 관리인 이 했다. 나는 그때 담배, 술을 하지 않아 헛돈을 쓰지 않았는데도 돈이 궁했다.
손님은 주로 일본군인이었으나 더러는 민간인도 있었다. 민간인은 대만옷을 입은 대만사람이었다. 난 그 위안소에만 5년 있었다. 한국에서 나를 데려간 사람이 위안소의 주인이었다. 그는 일본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외에도 한국에서 15,16세 되는 시골처녀들을 많이 데리고왔다. 위안소에는 평균 20여명의 위안부가 있었다. 한국에서 대리고 오는 처녀들은 우리 위안소를 거쳐 다른 곳으로 갔다. 그러나 어디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위안소 가까이에는 산도 해변도 있었으나 나는 5년 동안 한번도 산이나 해변에 나간일이 없다. 혼자 자유롭게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단으로 나가자고 할 때만 인도하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또한 위안소 근처에는 부대가 있었던 것 같고 우리 위안소말고 다른 곳도 여러 곳이 있었다. 우리는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이불하고 옷을 그 방에 두었다. 방은 크지 않았다. 이곳은 손님을 받는 방이고 우리가 거처하는 방은 현관에 있는 복도 양쪽에 있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우리가 화장하고 옷을 입고 손님을 기다리는 곳이 있었다. 현관밖에는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들이 많을 때는 민간인은 왔다가도 그냥 돌아가야 했다.
나는 대만에 5년 있는 동안 주인에게서 돈을 받아 본 일이 없다. 관리인은 여자였는데 아침마다 기계로 우리를 검사했다. 우리는 성병을 가지고 있으면 손님에게 옮고 그렇게 되면 장사를 못하게 된다고 했다. 병이 있으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금시 낫는 여자도 있었으나 수술을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도 수술을 받았다.
3) 패전 후
해방이 되자 주인이 없어졌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와서 기차를 타고 청도에 있는 집으로 왔다. 부모님은 내가 대만에서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남편도 모른다. 딸에게만 젊었을 때 일본공장에서 일을 했으나 돈을 한푼도 못받았다고 얘기했다. 부산에서 장사를 해도 20만원으로는 생활비를 벌 수 없어서 나눔의집으로 왔다. 나는 갈 데가 없다.
이 위에 증언자료는 홈페이지에 올려진 증언을 가져왔지만 이밖에 책이나 여러 자료에 보면 가슴이 아플정도로 슬프고 애절한 증언내용이 많습니다. 맨 처음 이 ‘위안부’의 대한 레포트가 상당히 힘들거라 예상을 하였지만. 이건.. 정말 뭐라 말할 수가 없네요. 이 발표를 준비하면서 너무 한탄하고 답답하고 그랬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참고문헌
박유하 저, 제국의 위안부, 뿌리와이파리, 2013
요시미 요시아키 저, 일본군 위안부 그 역사의 진실, 역사공간 2013
나눔의집 역사관후원회 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을 찾아서, 역사비평서 2002
이석태, 김재영 외 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민족문제연구소 2009
  • 가격2,3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14.06.23
  • 저작시기2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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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25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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