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익산과 미륵사
1.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이 숨쉬는 곳
2. 고대사에 있어 익산지역의 역사적 위치
1) 익산문화권 설정의 諸問題(제문제)
2) 문헌상으로 본 익산지역
3) 유물‧유적을 통해본 익산지역
3. 미륵사 창건 설화
1) 연기설화
2) 연기설화와 의의
4. 미륵사 창건배경
1) 미륵사상적 배경
2) 사회사상적 배경
3) 백제불교
Ⅱ. 미륵사지 터
1. 백제의 대사찰 미륵사
1) 미륵사지 터
2) 왕궁평성
3) 왕궁리 오층석탑
4) 오금사지
5) 동고도리 석불
6) 서금당지
2. 미륵사터의 구조와 규모
1) 미륵사 가람 모형
2) 미륵사지 석탑
3) 미륵사터 서석탑
4) 복원된 동석탑
5) 미륵사터 당간지주
1. 이루지 못한 백제의 꿈이 숨쉬는 곳
2. 고대사에 있어 익산지역의 역사적 위치
1) 익산문화권 설정의 諸問題(제문제)
2) 문헌상으로 본 익산지역
3) 유물‧유적을 통해본 익산지역
3. 미륵사 창건 설화
1) 연기설화
2) 연기설화와 의의
4. 미륵사 창건배경
1) 미륵사상적 배경
2) 사회사상적 배경
3) 백제불교
Ⅱ. 미륵사지 터
1. 백제의 대사찰 미륵사
1) 미륵사지 터
2) 왕궁평성
3) 왕궁리 오층석탑
4) 오금사지
5) 동고도리 석불
6) 서금당지
2. 미륵사터의 구조와 규모
1) 미륵사 가람 모형
2) 미륵사지 석탑
3) 미륵사터 서석탑
4) 복원된 동석탑
5) 미륵사터 당간지주
본문내용
지의 약 200년 동안 우리 나라에서는 목조 건축 형식의 목탑이 주로 건립되었다. 7세기초에 이르러 그 목탑의 전통이 이 지역의 풍부하고 질 좋은 황강암이라는 재료와 만나 마침내 미륵사탑을 빚어놓았다. 이 탑은 수많은 돌을 깎아 끼워 맞춰 목조 건축의 양식을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재료만 돌로 바뀌었을 뿐 이전의 목탑 양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어 우리 나라 석탑 발생의 시원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시작된 석탑은 신라 시대에 이르러 감은사탑을 거쳐 석가탑을 통하여 양식적 완성을 보게 된다.
탑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1층은 4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어 안에서 마주 통한다. 가운데 공간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1층 주변의 기둥은 당대 목조 건축의 양식대로 위쪽이 좁고, 높이의 약 3분의 2 되는 지점부터 부풀어 내려오는 배흘림 기법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 즉 지붕 아래의 처마 부분 또한 목조 건축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조 건축인 양 적당한 비례를 지닌 배흘림 기둥과 살포시 반전하는 추녀의 맵시에서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솜씨를 엿볼수 있다. 추녀를 반전시키되 그냥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두께를 주면서 반전시킨 점에 그 비결이 있었다. 위로 올라 가려는 동세가 위에서 누르는 무게에 눌려 긴장감있고 안정감있는 가운데 가벼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는 곱고 멋지고 귀여운 미적 가치로 전환된 것이다.
각 층이 1층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나 2층 이상은 높이가 얕아지고 처마 밑부분의 짜임 등이 간략해졌으며, 지붕의 폭이 알맞게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묵직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잃지 않았다. 안정감과 경쾌함, 장중함과 단아함을 함께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마음이고 솜씨였다.
☞ 석인상
미륵사탑 네 귀퉁이에는 석인상이 모두 네 분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한 분은 없어졌고 두분은 마모됐고 오직 동남쪽 모퉁이 석인상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나마도 얼굴의 형체는 비바람에 거의 분간되지 않으나 아담하고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덩어리와 가슴 앞에 간종그려 모은 두 손으로 1,300년전에 부여받은 자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직하게 지키고 있는 듯 하다. 이 석인상은 장승의 원조로 볼 수 있다. 훗날 경주 분황사나 다보탑에서 보이듯 석탑의 둘레에는 네 마리 사자를 모시는 것이 불교미술의 원리인데 불교가 아직 토속 신앙을 흡수해 가던 단계에서는 민간의 수호신앙을 그렇게 끌어 들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흡합(吸合)현상이라고 한다.
☞ 석등 받침
팔각 연화좌대의 맵시있는 귀꽃은 백제미술에서만 보이는 간결한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석등으로서 부드럽고 온유한 연꽃 받침은 언뜻 눈에 띄지 않는 미륵사터의 숨은 보물이다.
4) 복원된 동석탑
미륵사터에서의 그 생경함 탓에 제일 먼저 눈에 튀어 들어오는 것은 1993년에 18억원을 투입해 복원한 동석탑이다. 그 덕에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도 쉬운 미륵사터를 찾는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남아있는 서석탑과 발굴 조사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해내었다는 동석탑은 깨끗하고 단정하기는 하지만 이끼 낀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서석탑처럼 깊은 역사의 숨결이나 무게를 느끼기는 어렵다. 동쪽에 탑이 있었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탑이 동서로 100여m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데 탑신부가 20m, 상륜부가 7m로, 아래로 한변이 10.25m의 정방형의 기단 위에 서 있다. 동탑과 서탑을 번갈아 보면 서탑의 원래 모습이 동탑과 같으리라는 실감이나지 않는다.
5) 미륵사터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절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불교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당을 걸었던 깃대의 지주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 문 앞에 한 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 형식의 미륵사터에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각각 64m 되는 곳에 한 기씩, 두 기가 있다. 2기의 당간지주가 88.3m의 거리를 두고 서 있으며,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같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서탑이 위치한 것보다는 절터의 중심쪽으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하나의 가람배치 계획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구조는 4매의 길게 다듬어 만든 돌로 지복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기단은 두 개의 장대석을 가공하여 조합하였다. 그리고 두 지주사이에는 간대받침을 별개의 돌로 만들어 기웠는데 간대받침은 상단과 하단에 반원형의 장식을 베푼 것으로 중앙에는 간대의 고정을 위한 구멍이 있다. 향지주의 내면에는 간대를 세웠을 때 고정시키기 위한 간공을 2개처에 설치하였으며, 간구를 두었다.
지주의 기단은 장방형으로서 여러 돌을 결구하여 면석을 이루었는데 측면 하부에 일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사방에 안상을 조각하였다. 지주는 파손이 없고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내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양 외측면에는 주변을 따라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도 한 줄의 선대를 새겼다. 간주를 고정시키는 간은 세 곳에 마련하였는데 내면 정단의 중앙부에 정방형 간구가 있으며 그 하면으로 내려오면서 방형의 간공이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고 그 형태도 아름다우며, 가늘고 긴 호형주두에 굴곡을 마련하고 각 층면에 선대를 조식하였는데 같은 양식을 숙수사 당간지주와 부석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다.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지주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선을 도드라지게 하였고 가운데에도 한 줄의 선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름하게 깎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다. 대체로 필요한 최소한의 장식만을 하여 번잡하지 않은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데,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모습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1층은 4면이 모두 3칸으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가운데에 문이 뚫려 있어 안에서 마주 통한다. 가운데 공간에는 커다란 돌기둥이 세워져 전체의 무게를 받치고 있다. 1층 주변의 기둥은 당대 목조 건축의 양식대로 위쪽이 좁고, 높이의 약 3분의 2 되는 지점부터 부풀어 내려오는 배흘림 기법으로 되어 있다. 기둥과 지붕이 만나는 곳, 즉 지붕 아래의 처마 부분 또한 목조 건축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조 건축인 양 적당한 비례를 지닌 배흘림 기둥과 살포시 반전하는 추녀의 맵시에서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솜씨를 엿볼수 있다. 추녀를 반전시키되 그냥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두께를 주면서 반전시킨 점에 그 비결이 있었다. 위로 올라 가려는 동세가 위에서 누르는 무게에 눌려 긴장감있고 안정감있는 가운데 가벼운 변화가 일어나고 그 변화는 곱고 멋지고 귀여운 미적 가치로 전환된 것이다.
각 층이 1층과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나 2층 이상은 높이가 얕아지고 처마 밑부분의 짜임 등이 간략해졌으며, 지붕의 폭이 알맞게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정연하고 묵직하면서도 상큼한 맛을 잃지 않았다. 안정감과 경쾌함, 장중함과 단아함을 함께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 백제 사람들의 빼어난 마음이고 솜씨였다.
☞ 석인상
미륵사탑 네 귀퉁이에는 석인상이 모두 네 분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한 분은 없어졌고 두분은 마모됐고 오직 동남쪽 모퉁이 석인상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나마도 얼굴의 형체는 비바람에 거의 분간되지 않으나 아담하고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덩어리와 가슴 앞에 간종그려 모은 두 손으로 1,300년전에 부여받은 자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직하게 지키고 있는 듯 하다. 이 석인상은 장승의 원조로 볼 수 있다. 훗날 경주 분황사나 다보탑에서 보이듯 석탑의 둘레에는 네 마리 사자를 모시는 것이 불교미술의 원리인데 불교가 아직 토속 신앙을 흡수해 가던 단계에서는 민간의 수호신앙을 그렇게 끌어 들였던 것이다. 이런 것을 흡합(吸合)현상이라고 한다.
☞ 석등 받침
팔각 연화좌대의 맵시있는 귀꽃은 백제미술에서만 보이는 간결한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석등으로서 부드럽고 온유한 연꽃 받침은 언뜻 눈에 띄지 않는 미륵사터의 숨은 보물이다.
4) 복원된 동석탑
미륵사터에서의 그 생경함 탓에 제일 먼저 눈에 튀어 들어오는 것은 1993년에 18억원을 투입해 복원한 동석탑이다. 그 덕에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도 쉬운 미륵사터를 찾는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남아있는 서석탑과 발굴 조사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해내었다는 동석탑은 깨끗하고 단정하기는 하지만 이끼 낀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서석탑처럼 깊은 역사의 숨결이나 무게를 느끼기는 어렵다. 동쪽에 탑이 있었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탑이 동서로 100여m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데 탑신부가 20m, 상륜부가 7m로, 아래로 한변이 10.25m의 정방형의 기단 위에 서 있다. 동탑과 서탑을 번갈아 보면 서탑의 원래 모습이 동탑과 같으리라는 실감이나지 않는다.
5) 미륵사터 당간지주
당간지주란 절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불교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당을 걸었던 깃대의 지주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당간지주는 절 문 앞에 한 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 형식의 미륵사터에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각각 64m 되는 곳에 한 기씩, 두 기가 있다. 2기의 당간지주가 88.3m의 거리를 두고 서 있으며, 두 당간지주는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같다. 이 당간지주는 보물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서탑이 위치한 것보다는 절터의 중심쪽으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하나의 가람배치 계획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구조는 4매의 길게 다듬어 만든 돌로 지복석을 놓고 그 위에 기단을 마련하였는데, 기단은 두 개의 장대석을 가공하여 조합하였다. 그리고 두 지주사이에는 간대받침을 별개의 돌로 만들어 기웠는데 간대받침은 상단과 하단에 반원형의 장식을 베푼 것으로 중앙에는 간대의 고정을 위한 구멍이 있다. 향지주의 내면에는 간대를 세웠을 때 고정시키기 위한 간공을 2개처에 설치하였으며, 간구를 두었다.
지주의 기단은 장방형으로서 여러 돌을 결구하여 면석을 이루었는데 측면 하부에 일단의 받침을 조각하였고 사방에 안상을 조각하였다. 지주는 파손이 없고 보존상태가 양호한데 내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양 외측면에는 주변을 따라 외연선을 돌리고 중앙에도 한 줄의 선대를 새겼다. 간주를 고정시키는 간은 세 곳에 마련하였는데 내면 정단의 중앙부에 정방형 간구가 있으며 그 하면으로 내려오면서 방형의 간공이 두 군데 설치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대체적으로 장식이 적고 그 형태도 아름다우며, 가늘고 긴 호형주두에 굴곡을 마련하고 각 층면에 선대를 조식하였는데 같은 양식을 숙수사 당간지주와 부석사 당간지주에서도 볼 수 있다.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지주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선을 도드라지게 하였고 가운데에도 한 줄의 선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름하게 깎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다. 대체로 필요한 최소한의 장식만을 하여 번잡하지 않은 단정한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는데,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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