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의 교통로(택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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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교통로(택리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곳이 되었다.
공주는 충청감사가 머무는 곳으로, 백제 말기 당나라 장수 유인원이 웅진 도독부를 두었던 곳이다. 한양에서 삼백 리 떨어져 있으며, 차령 이남과 금강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공주에서 금강을 건너고 차령을 넘어 천안과 직산을 거쳐 북으로 가면 경기도 양성에 이르고, 진위·수원·과천을 따라가면 서울에 이른다. 이 길을 따라가면 직산 이북은 모두 들이 흩어져 있고 땅이 메마르며 좀도둑이 많아서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청소년을 위한 택리지’ 128쪽
강물은 굽이굽이 서해로 흘러들고, 경기도에 대해 설명하겠다. 여주읍 남쪽에 있는 이천과 음죽은 그 풍속이 비슷하다. 북쪽으로는 지평과 양근이 있는데, 강원도 홍천과 맞닿아 있다. 산이 흩어지고 골이 깊어 사람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다.
여주 서쪽은 광주 석성산인데, 이곳에 남한산성이 있다. 성안은 그리 험하지 않지만 성 밖 산기슭은 매우 급하여 살기를 띤다. 그런 까닭에 중요한 방위선의 구실을 하는바, 난리가 나면 반드시 전쟁터가 된다. 그러므로 광주 일대는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육지가 끝나는 곳에 화량포 첨사의 진이 있고, 진에서 십 리쯤 바다를 건너면 대부도다. 이곳에는 모두 어민들만 사는 까닭에 남양 서쪽 마을이 생선과 소금에서 얻는 이득을 독점한다. 이섬은 땅이 비옥하고 백성이 많으며, 남쪽에서 오는 뱃길의 첫 관문으로 강화와 영종의 바깥문 구실을 한다. 옛날에 수군영을 설치했는데, 꼬동도로 옮겨 가면서 말을 치는 목장으로 변했다.
‘우리국토에 새겨진 우리 문화와 역사’ 181쪽
정조는 화산으로의 천원과 화성 건설에서 자신이 갖고 있는 풍수적 안목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관방지역으로서 수원이 갖고 있는 입지 특성을 최대한 살려 군사적 요새지로 삼아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운영하는 효과를 높이고, 상업과 농업활동을 활발하게 촉진시키는 거점지역으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공간으로 삼고자 했다.
‘우리국토에 새겨진 우리 문화와 역사’ 96쪽
조선의 수도 한양은 이미 고려 말부터 풍수 지리적 길지성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역성혁명으로 왕위에 오른 이성계는 전국 모든 교통로인 한강에 이웃해 있으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을 새 왕조의 수도로 선정했다. ‘다시 쓰는 택리지 1권’ 102쪽
한양의 길과 골목이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원래 어떤 기준과 선에 따라 한양이라는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니라, 명당과 길지에 궁궐을 짓고 집터를 고른 다음에 큰길과 작은 길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직업에 따라 거주지를 정해주었는데, 한양에 집을 지으려면 나라로부터 땅을 임대해야 했던 까닭에 한양 사람은 그 거주지역만 가지고도 신분과 직업, 권세의 유무를 알 수 있었다.
4.참고문헌
이중환, 2006;청소년을 위한 택리지, 경기도 파주: 서해문집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3;우리 국토에 새겨진 문화와 역사, 서울: 논형
신정일, 2004;다시쓰는 택리지1, 서울: 휴머니스트
신정일, 2012;새로쓰는 택리지2, 서울: 다음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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