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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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성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던 나의 동무에게 누명을 씌우고 타락하게 만들었다. 내가 바라던 남조선 노동당의 모습인 이것이 아닌데... 우리의 이상이 몇사람의 권력욕으로 인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인가.. 물론 박헌영 동무뿐만이 아니다. 간부들의 분파적 행위들 또한 위기로 느껴진다. 내가 젊었을 적부터 열망했던 사회주의를 생각해보고, 또 다시 현실을 직시하면 한숨과 함께 회의감에 빠지곤 한다.
중도 좌파인 여운형에 대한 박헌영의 공격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내가 아무리 남로당의 일원이라 하더라도 여운형에 대한 독단적인 비방은 잘못된 것이라 생각한다.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 친미주의자, 기회주의자, 양반지주출신이라 비방하는 것이 오히려 대중선동을 노리는 박헌영 동무의 술수 아닌가.. 주도권 독점을 위한 진보정치운동의 방해공작은 중단되어야 한다. 남로당의 운명이 정파적 이익이나 당권욕으로 인해 망가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우리가 내세운 강령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실시 될 수 있고, 그로 인해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나라.. 착취가 없는 그런 나라가 되는 것이 우리의 진정한 목표였지 않은가.. 내가 꿈꿔왔던 진정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눈앞의 이익만 좇는 이런 현실이 빨리 고쳐져야 할 것이다.
1950年 11月 7日
한동안 전쟁 준비와 여러 가지 일로 경황이 없어 일기를 쓰지 못했다.
전쟁이 시작 된지 5개월째. 처음엔 전세가 유리하다 싶더니 어느 새 남조선군이 반격을 해온다. 지금은 만포진에 피신해 있는 상태이다. 조금 전 당 분열의 기미가 보이는 일이 일어났다. 소련에서 온 대사님께서 베푸신 연회에서 김일성 동무와 박헌영 동무가 만취상태로 싸움이 붙었다. 남침을 개시하면 남조선에서 우리 동무들이 봉기할 것이라 박헌영 동무가 장담했지만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김일성 동무가 나무란 것이 발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전쟁이 열세에 있는데 내부에서 분열까지 일어나다니... 이래저래 당의 미래가 어둡다.
1952年 12月 ○日
당 출범 이후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2년 전부터 싹이 트기 시작한 김일성파와 박헌영파의 갈등이 너무나도 깊어졌다. 김일성파는 전쟁의 실패를 우리 남로당계열의 책임으로 미루고 있다. 이미 여러 동무들이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또 며칠 전 합동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동무는 박헌영 동무를 종파쟁이로 몰아세웠다. 물론 박헌영 동무가 전쟁의 실패에 일부 책임도 있긴 하지만, 내가 볼 땐 요즘의 김일성 동무의 행동은 당에서 권력의 핵심을 잡기위한 행동인 것 같다.
우리 남로당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조선의 적화통일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아... 어찌하면 좋은가...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나의 입장
-일제강점기 해방 후 이념간의 대립 등 혼란을 거듭한 우리나라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행동방향을 가졌다. 자신의 이해관계 혹은 신념 등의 문제로 다양한 입장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김성수는 일제강점기에 다양한 민족주의 운동을 펼치면서도 일본과의 관계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현재, 친일 논쟁이 있을 정도로 일본과의 관계를 어느정도 유지하면서 자신의 사업을 운영해나갔다. 반면, 좌익 측 인물들은 일본을 절대적으로 적대시하였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무조건적인 적대보다는 실질적 성과를 위한 일본과의 거짓우호관계가 필요했을 것 같다. 물론, 직접 나서서 친일행위를 하는 것은 문제가 되겠지만 일본의 눈에 거슬리지 않을만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고 나서는, 이념의 대립에 휩싸이지 않고 주체적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갈 만한 힘이 필요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등의 외세의 간섭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또 다시 주춤거리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그 당시 힘이 없었기 때문에 ‘나’라도 그 당시 지도자들처럼 외세의 힘에 어느정도 의존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권력을 위해 국가의 안전을 무시하는 세력에 대한 국민의 자각을 위해 노력하고, 또한 그들을 막기 위한 각종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외세에 대한 권력을 이용하면서도 그에 독립하며 주체적인 힘을 기를만한 조직이나 단체활성화를 장려하기도 했을 것이다. 세계적인 정세를 파악하기 위한 눈을 기르기 위해 개인적으로라도 선진화된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활동범위를 넓혀야 할 것이다.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도 자각할 수 있는 국민으로서라도 말이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미국 측의 자유주의체제에 입각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라 하더라도 세계적인 추세에 맞춘 자유주의에 대한 신념이 나를 지배할 것이다. 일제시대 때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과 같은 활동 등은 좌익계열의 사람들의 업적이라 할 수 있지만 그들이 가진 신념을 바탕으로 한 사회체제 형성은 무리가 있다고 본다. 이승만 독재체제에서는 절대 독재에 반대할 것이며, 언론보도를 통한 독재의 비판을 추진 할 것이다. 교육측면에서도 인촌김성수와같이 다양한 활동을 펼치며 미래의 주역의 선진화된 가치관 함양을 위해서 적극적인 노력을 펼칠 것이다. 또한 해방 후 비중있는 문제로서 등장하는 친일문제에 관해서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다. 박흥식이나 이광수와 같이 적극적으로 친일행동을 자행하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처벌을 받아야 하나, 일본의 식민지화가 목적이 아니라 불가피한 친일 행위를 한 자들에 대해서는 관용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 시대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기본적인 생활유지나 장기적인 시각으로서의 해방을 위해 소극적인 친일행위를 펼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그가 끼친 영향 등에 대한 다양한 측면의 접근을 통해 처벌의 정도가 달라져야 한다,
※참고문헌 및 자료
-http://chang256.new21.net/board/board.php?db=530&no=2716
-www.inchonmemorial.co.kr
-주간조선(유석춘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의 글)
-고대신문 1501호 2005년 3월 22일
-엔싸이버 백과사전
-네이버 백과사전
-야후 백과사전
- 역사신문6(1910~1945年) <사계절>
- 한국사 <한길사>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3 <웅진출판>
- 인물한국사 <청아>
  • 가격1,4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09.30
  • 저작시기2013.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47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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