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가나안과 이스라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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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 가나안과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가나안과 이스라엘

Ⅱ. 후기 청동기 시대 이전

Ⅲ. 후기 청동기 시대

Ⅳ. 철기 1기

Ⅴ. 주전 10세기

Ⅵ. 철기 2기


Ⅶ. 맺음말

본문내용

던 것을 기념하여 기록했다. 이 석비는 샬만에셀 3세의 큰 승리를 자랑하지만, 샬만에셀 3세가 주장하는 승리가 군사적 교착 상태와 같은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샬만에셀 3세는 시리아에 있는 오론테스 강까지 다다랐지만, 시리아-팔레스틴 왕국들의 다양한 군대들로 구성된 거대한 연합군에 의해 하맛 근처에 있는 카르카르 전투에서 멈추게 되었다. 이 연합군은 시리아-팔레스틴 왕국들의 가장 강력한 왕인 다메섹의 하닷에셀이 이끌었던 군대였다. 그의 부관들 중에 뛰어났던 자는 이스라엘의 아합이었으며, 아합은 많은 전차와 군대들을 이 연합군에 지원했다. 주전 9세기 중반에 이스라엘은 그 시대 정치에 있어서 강력한 세력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성서는 이에 대해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대신 독자들에게 오므리와 그의 왕조가 가나안 안에 있던 중요하지 않은 세력이었다는 인상을 준다.
주전 727년 강력한 황제 티글랏빌레셋 3세가 죽자, 봉신 왕국들은 반역을 꾀했다. 사마리아의 호세아 왕은 주전 720년대에 이 유혹으로 인해 패하게 되었다. 비록 이집트 왕조의 신원을 확신할 수는 없었을지라도 호세아는 이집트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 때 이집트는 델타의 여러 지역들에서 쇠퇴하는 제22왕조, 23왕조, 24왕조에 의해 지배를 받던 지역 왕국들로 나뉘게 되었고, 남쪽에서는 누비아인에 의한 제25왕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 왕들이 비록 돕고는 싶었을지 몰라도, 이 왕들 중 어느 누구도 작은 가나안 도시 국가를 도울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다. 샬만에셀 5세는 사마리아를 공격했으며, 비록 그가 전쟁 동안에 죽었을지라도, 사르곤 2세 왕의 통치하에 있던 앗시리아는 사마리아를 손에 넣었고, 사마리아의 중요한 사람들을 제국의 다른 지역들로 이동시켰다. 사마리아의 도시는 주전 722년에 앗시리아 속주로 변경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왕국은 영원히 사라졌다.
철기 2기 유다 왕조
주전 7세기 후반 앗시리아는 점점 약해져 갔다. 앗시리아 제국은 너무 커서 유지할 수 없었고, 앗시리아의 마지막 왕들은 외부의 도전에 견뎌낼 수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에 있던 일부 봉신 왕국들은 자신들의 종주에 대항하여 싸울 기세였다. 메디아는 앗수르 성읍을 주전 614년에 파괴했다. 그 후 2년 안에 새롭게 독립한 메디아와 바벨론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으며, 이 중 바벨론이 메디아 보다 더 유력한 세력이었다. 주전 612년에 메데는 바벨론 왕 나보폴라사르와 동맹을 맺게 되었고, 이들은 니느웨의 위대한 앗시리아 문화 도시를 공격해서 파괴했다. 니느웨는 산헤립 시대 이후로 앗시리아의 수도였다. 이 사건이 성서 저자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예언자 나훔은 니느웨의 종말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기쁜 나머지 이에 대해 세 장씩이나 기록했으며, 몰락한 니느웨에 대해 비웃었다. 나훔의 보복적 태도에 동의하지 않던 다른 성서 저자는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교훈적 이야기를 통해, 야웨는 왜 그 ‘악한’ 도시조차도 은혜를 베풀었던 것이었을까에 대해 심사숙고한다. 이 이야기는 요나서이다.
주전 605년 이집트의 새로운 왕 느고 2세는 바벨론의 새로운 왕 느부갓네살 2세에게 칼케미쉬 전투에서 패했다. 그러자 가나안으로부터 이집트의 영향력이 빠르게 사라졌고, 여러 나라들 중에 있던 예루살렘이 느부갓네살 2세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왕하 25장), 예루살렘은 느부갓네살 2세에게 두 번째 배반을 했으며, 그 결과 주전 587년 혹은 586년 바벨론은 예루살렘을 파괴했다. 이집트의 제26왕조는 유다를 돕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바벨론으로 포승에 묶여 끌려갔고, 유다는 바벨론 속주로 변했다. 유다 왕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Ⅶ. 맺음말
주일학교 신앙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었고 그들의 이야기는 매우 귀감이 될 만한 신앙적 삶으로 다가왔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많다. 천지창조 이야기, 이스라엘의 여리고성 정복 기사 그리고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 등등 성서에 나온 이야기를 백퍼센트 역사적 사실로서 믿으며 자라왔다. 그러다가 성서의 많은 부분들이 실제 역사적 사실로서는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이를 역사적 사실로서 확고하게 믿어왔던 개신교인이라면 매우 충격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저자 놀은 이 책을 통하여, 그 간의 고대 이스라엘 연구를 치밀하게 논증하고 있다. 그 간의 연구는 성서연구의 담론에 갇힌 채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스라엘 역사 서술에 집중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 까닭에 고고학적 발굴 작업을 통하여 어떤 유물이 발견되어도 그것을 성서의 기록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로 해석하려는 오류를 너무 자주 범한다는 지적이다. 예컨대 흔히 거대한 제국을 연상시키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지금까지 전문적인 고고학자들에 의해 출토되고 확인된 고고학적 흔적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있다고 해봐야 텔 단이라는 곳에서 “다윗의 집”을 언급한 돌기둥 일부가 발견되었을 뿐이다. 이것만을 가지고는 다윗제국을 증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함에도 이 돌기둥 조각 하나는 다윗 왕에 대한 성서의 기록들이 온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놀은 이러한 편향된 주장들을 일축하고 이 돌기둥이 주전 9세기나 8세기에 유다 왕국이 존재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일지라도 유다 왕국의 범위 구성이나 다윗 치하의 왕정이 최고 수준의 ‘제국’을 표상한다는 믿음 중 어느 것도 확증해 주지 않는다고 꼬집는다.
워낙 문제제기가 발본적이고 치밀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고대 이스라엘 연구에서 막강한 학문적 지배력을 구가하고 있던 학자들이 놀의 비판 앞에 견뎌내지 못하고 맥없이 주저앉는 느낌이다. 이러한 놀의 문학연구와 고고학적 자료를 결합한 연구결과를 읽고 있으면, “이스라엘 역사에서 족장시대, 출애굽시대, 가나안 정복시대는 역사적 ‘사실’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에 구약학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놀이 제기한 부분들을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보는 게 책을 읽고 난, 나 자신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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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5.04.27
  • 저작시기2015.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65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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