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_헬레니즘세계
보충하기-다른 의견
본론1-1_헬레니즘세계의 정치
본론1-2_헬레니즘세계의 사회와 경제
본론1-3_헬레니즘세계의 중심도시 알렉산드리아
본론2-1헬레니즘문화의 특성(철학-초기)
본론2-2_헬레니즘의 문화의 특성(철학-신앙의 변화)
결론_헬레니즘세계의 최후
보충하기-다른 의견
본론1-1_헬레니즘세계의 정치
본론1-2_헬레니즘세계의 사회와 경제
본론1-3_헬레니즘세계의 중심도시 알렉산드리아
본론2-1헬레니즘문화의 특성(철학-초기)
본론2-2_헬레니즘의 문화의 특성(철학-신앙의 변화)
결론_헬레니즘세계의 최후
본문내용
모주 어떤 의미에서는 찬탈자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주장에 정통성을 얻고, 새로온 왕조 창건의 근거를 강화하기 위해서 종교의 도움을 구했다. 특별한 수호신들은 한결같이 올림포스의 신이었다. 마테도니아의 안티고노스 왕조는 헤라클레스의 후예임을 내세웠으며, 셀레우코스 왕조의 수호신은 아폴로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특히 디오니소스 숭배에 헌신했는데, 그것은 일찍이 프톨레마이오스1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숭배를 확립했다. 그가 죽은 쥐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부친을 신격화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몇 명 왕은 생전에 자신들(그리고 왕비들)의 이름을 숭배대상에 추가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시대에 시작된 왕조숭배의 성장은 대부분의 헬레니즘 왕국에 공통 관행이던 ‘지배자 숭배’라는 일반적인 맥락과 잇닿아 있었다. 헬레니즘 군주들은 통치체제의 취약성을 종교와 이념의 수단으로 보완하려 하였고, 군주를 신격화했다. 종종 인민이 왕으로서 지배자의 지위를 인정해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신격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도시들이 왕과 그 왕조를 신처럼 예우한 그 배경에는 전통적 신들에 대한 회의주의가 자리 잡아, 결국 실권을 휘두르는 군주들이 신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배자 숭배 관행은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하여 그 문화를 상속한 로마시대로 이어져서 ‘황제 숭배’의 선례가 되었다.
결론_헬레니즘세계의 최후
이미 160년대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는 로마의 독주를 견제할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로마로서는 다만 그 세계에 대한 패권을 영토합병으로 전환할 적절한 시점을 찾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전환점은 대략 140년대였다. 마케도니아는 마침내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으며, 또 130년대에 페르가몬 왕국이 로마인민에 증여되자, 로마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속주 하나를 더 늘렸다. 소아시아내륙의 폰토스 왕국과 치른 전쟁 이른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전쟁(88~63년)의 장기화는 그 왕국의 위력보다는 다분히 로마측의 사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로마가 이렇게 헬레니즘 왕국들을 하나씩 속주화해가던 과정은 30년 악티움 해전의 결과사실상 종결되었다. 즉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던 프톨레마이오스와조의 최후이기도 했던 것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마지막 강국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전리품으로, 개인 소유의 속주가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대한 숭배를 확립했다. 그가 죽은 쥐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부친을 신격화했다. 그 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몇 명 왕은 생전에 자신들(그리고 왕비들)의 이름을 숭배대상에 추가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1세 시대에 시작된 왕조숭배의 성장은 대부분의 헬레니즘 왕국에 공통 관행이던 ‘지배자 숭배’라는 일반적인 맥락과 잇닿아 있었다. 헬레니즘 군주들은 통치체제의 취약성을 종교와 이념의 수단으로 보완하려 하였고, 군주를 신격화했다. 종종 인민이 왕으로서 지배자의 지위를 인정해 그를 숭배하고 그에게 신격을 부여하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도시들이 왕과 그 왕조를 신처럼 예우한 그 배경에는 전통적 신들에 대한 회의주의가 자리 잡아, 결국 실권을 휘두르는 군주들이 신들을 대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러한 지배자 숭배 관행은 헬레니즘 세계를 정복하여 그 문화를 상속한 로마시대로 이어져서 ‘황제 숭배’의 선례가 되었다.
결론_헬레니즘세계의 최후
이미 160년대 이후, 헬레니즘 세계에는 로마의 독주를 견제할 힘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로마로서는 다만 그 세계에 대한 패권을 영토합병으로 전환할 적절한 시점을 찾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전환점은 대략 140년대였다. 마케도니아는 마침내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으며, 또 130년대에 페르가몬 왕국이 로마인민에 증여되자, 로마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속주 하나를 더 늘렸다. 소아시아내륙의 폰토스 왕국과 치른 전쟁 이른바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전쟁(88~63년)의 장기화는 그 왕국의 위력보다는 다분히 로마측의 사정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로마가 이렇게 헬레니즘 왕국들을 하나씩 속주화해가던 과정은 30년 악티움 해전의 결과사실상 종결되었다. 즉 그것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던 프톨레마이오스와조의 최후이기도 했던 것이다. 헬레니즘 세계의 마지막 강국 이집트는 옥타비아누스의 전리품으로, 개인 소유의 속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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