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시대의 정신내용이 무서우리만치 서로 복잡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은 특정형태의 종교적 신앙과 천직논리 사이에 어떤 ‘선택적 친화관계’가 용인되는지, 또 용인된다면 그 이유까지도 규명해야할 것이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도 그 자체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조건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인정한다. 즉 베버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정신'에 의해서만 형성된 것이 아님을 밝힌다. 베버는 자신이 보여줬던 특유의 유연함을 다시 한 번 발휘하며 존재와 의식의 상호작용적 시각을 이해야하는지의 필요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후에는 크게 두 가지의 비판이 제시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정신을 상실한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전망에 대한 논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 자본주의가 과연 막스 베버가 말했듯, 자본주의 정신이 심어져있는 사회가 맞는가? 라는 질문이다. 현대인에게 직업에 대한 금욕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금욕을 위한 직업이 아닌, 욕구를 위한 직업이 바로 현대사회에서의 직업의 개념이다. 영리와 소비가 작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추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일면에 대해서 막스 베버는 천민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표현한다. 즉 베버의 표현으로서 자본주의의 정신이 없는 자본주의. 직업수행의 의미는 경제적인 이유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 즉 자본주의 정신이 없어도 잘만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무엇인가? 에 대한 본론적인 비판이 제기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비판으로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베버가 말한 천민자본주의의 미래는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페혜와도 너무나 겹쳐지는 것 같다. 노동에 대한 소외, 그리고 더 이상 인류 스스로가 조종할 수 없는 고삐 풀려버린 생산력.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제 우리의 손을 벗어나버린, 주객이 전도된 위치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그 자본주의가 우리를 속박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같이 말이다. 물론 그들이 말한 자본주의 그 끝 이후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다른 전망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으론 여기서 맑스와의 베버와의 결론의 한 합치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베버의 표현이었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논의이다. 즉 맑스가 말한 자본가와 노동가의 불평등의 격차와 대립은 단순히 생산력에 의해서 비롯되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알튀세르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자본주의를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확장시키고 있다. 알튀세르까지의 논의는 여기서는 부족하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즉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란 현대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정신’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자본주의의 초기에 ‘자본을 형성하기 위했던’ 초기의 자본주의 정신처럼, 현대 자본주의도 그 자신의 자본주의를 위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말의 다른 표현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선택한 한 자본주의를 위했던 ‘정신’, 즉 더욱 사회학적인 표현으로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를 맑스적 관점으로 재해석 해보며 글의 논의를 마쳐본다. 즉 자본주의정신이 자본주의를 형성시켰다는 관념론으로서가 아닌,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자본주의를 키워야 했던 자본가 계급들이 자본주의를 확장시키기 위했던 이용했던 역사적, 상황적 맥락 속에서 '잠시' 형성되었었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정신'이 맞는 것이지 않을까? 라는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후에는 크게 두 가지의 비판이 제시되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자본주의정신을 상실한 현대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혹은 전망에 대한 논의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대 자본주의가 과연 막스 베버가 말했듯, 자본주의 정신이 심어져있는 사회가 맞는가? 라는 질문이다. 현대인에게 직업에 대한 금욕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금욕을 위한 직업이 아닌, 욕구를 위한 직업이 바로 현대사회에서의 직업의 개념이다. 영리와 소비가 작동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추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 일면에 대해서 막스 베버는 천민주의적 자본주의라고 표현한다. 즉 베버의 표현으로서 자본주의의 정신이 없는 자본주의. 직업수행의 의미는 경제적인 이유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것. 즉 자본주의 정신이 없어도 잘만 움직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무엇인가? 에 대한 본론적인 비판이 제기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다른 비판으로서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베버가 말한 천민자본주의의 미래는 맑스가 말한 자본주의의 페혜와도 너무나 겹쳐지는 것 같다. 노동에 대한 소외, 그리고 더 이상 인류 스스로가 조종할 수 없는 고삐 풀려버린 생산력.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제 우리의 손을 벗어나버린, 주객이 전도된 위치가 되어버린 것, 그리고 그 자본주의가 우리를 속박하는 현실에 대한 묘사와 같이 말이다. 물론 그들이 말한 자본주의 그 끝 이후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다른 전망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으론 여기서 맑스와의 베버와의 결론의 한 합치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베버의 표현이었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논의이다. 즉 맑스가 말한 자본가와 노동가의 불평등의 격차와 대립은 단순히 생산력에 의해서 비롯되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는 알튀세르의 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자본주의는 그 자신의 자본주의를 위해, 그리고 생존을 위해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확장시키고 있다. 알튀세르까지의 논의는 여기서는 부족하겠지만,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즉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란 현대 자본주의가 살아남기 위한 새로운 ‘자본주의정신’이 아닌가? 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과거 자본주의의 초기에 ‘자본을 형성하기 위했던’ 초기의 자본주의 정신처럼, 현대 자본주의도 그 자신의 자본주의를 위해 새로운 자본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말의 다른 표현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가 자본주의를 탄생시킨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선택한 한 자본주의를 위했던 ‘정신’, 즉 더욱 사회학적인 표현으로는 우리가 이데올로기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이를 맑스적 관점으로 재해석 해보며 글의 논의를 마쳐본다. 즉 자본주의정신이 자본주의를 형성시켰다는 관념론으로서가 아닌,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자본주의를 키워야 했던 자본가 계급들이 자본주의를 확장시키기 위했던 이용했던 역사적, 상황적 맥락 속에서 '잠시' 형성되었었던 이데올로기로서의 '자본주의정신'이 맞는 것이지 않을까? 라는 그런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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