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목 차 -
Ⅰ. 머리말 --------------------------------1
Ⅱ. 본문 --------------------------------1
1. 수양제 -------------------------1
1) 수양제의 정치 -------------3
2. 당태종 -------------------------4
3. 수양제와 당태종의 비교 ----------6
Ⅲ. 꼬리말 --------------------------------7
Ⅳ. 참고문헌 ------------------------------8
Ⅰ. 머리말 --------------------------------1
Ⅱ. 본문 --------------------------------1
1. 수양제 -------------------------1
1) 수양제의 정치 -------------3
2. 당태종 -------------------------4
3. 수양제와 당태종의 비교 ----------6
Ⅲ. 꼬리말 --------------------------------7
Ⅳ. 참고문헌 ------------------------------8
본문내용
있다는 것이다. 문제가 수나라를 즉위하고, 강력한 중농정책으로 갑작스러운 부가 생겨난 것이다. 갑작스러운 부를 쓰지 않을 경우 발생할 토지겸병을 방지하기 위하여, 문제는 대운하, 인수궁의 건축과 또한 고구려 정벌을 실시하였다. 양제는 단순한 과거에 대해 거음을 쫓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단순한 시대적 산물에 불과한것이였을것이며 그의 정책은 초기에 분명 없이 많은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에는 얼마만큼의 사업에 얼마만큼의 지출이 필요하다는 것의 파악이 불가능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업을 한꺼번에 실행하고, 한번 실행된 사업이라 쉽게 끈내지 못하였을 것이다. 즉 분명 양제의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단순한 양제 개인의 잘못이였다는점이 아닌, 그 시대적 상황의 불가항적인 부분을 배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제가 폭군으로 기억되는 것은 양제의 사적을 주로 언급한 수서가 당태종의 명을 받고 그 공신 위징등의 인물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태종과 위징은 수양제에 대한 반란에 결기하여 수양조를 타도한 이들이기에, 당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위해서는 수양제의 폭군적 이미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제에게는 폭군으로 간주되는 면 이외의 사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서에 적혀있는데로, 당왕조가 원하는 데로 무분별한 폭군이 되어버린것이다.
당태종의 경우 수양제와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시기가 다른 시기에 비하여 나은 점이 많았던 시기였다고 하여도, 월등하게 뛰어난 시기는 아니였을것이다. 허나 과거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료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황제의 언동을 기록한 기거주를 보고 싶어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즉 그는 생전에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그의 정관에 치에 대한 것에도 윤색이 있었다는 의심을 품어볼 수 있다. 632년 태종에 백관이 봉선요청을 하였으나, 위징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로 위징은 “수말대란의 뒤를 이어 호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곡물 창고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봉선을 위한 행차와 그에 따른 청승만기 또 그것들에 드는 비용은 막대하여 인민은 이를 견뎌낼 수 없습니다. 지금 낙양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연기는 드물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자치통감 권 194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일이 있기 전 태평의 모습이 있었다는 기록 또한 있다. 이는 당태종에 의하여, 그에 대한 기록에 윤색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Ⅲ. 꼬리말
이제까지 수양제와 당태종에 대하여 파악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당태종이 이룩한 정관에 치가 사실은 수나라의 바탕아래에서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의 남북의 운하와 과거제도를 이용하였고, 북위 이래로 이어온 균전과 조용조, 부병제가 이미 존재하여 나라의 기틀이 만들어 졌으며, 내외의 위협도 이미 제거되어 황제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기였다. 즉 수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기에 또한 당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당태종은 수양제의 발판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두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고 밖에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었다.
두 나라의 두 황제, 수양제와 당태종은 서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였던 사람 이였으나,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하게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사료의 역사서술방법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양제의 폭군적 이였던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며, 당태종의 잘 한점 또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를 가지는 것은 분명 역사서에 적혀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문득 어떤 수업에선가 들었던 교수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었다. “과거는 기억이라기보다는 해석이다” 그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시큰둥하게 들어 넘긴게 컸었는데, 이번 수양제와 당태종에 대하여 비교를 하면서, 많은 부분 깨달게 된 것이 있었으며, 역사를 공부하는 한명의 학생으로서, 그리고 후에도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계속하려고하는꿈을 가진 이로서 느낀 점이 많은 조사였다.
Ⅳ. 참고 문헌
중국의 역사, 혜안, 누노메 조후저, 임대희역, 2001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 하다. 푸른역사, 레이 황저, 권중달역, 2001
중국의 황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제가 폭군으로 기억되는 것은 양제의 사적을 주로 언급한 수서가 당태종의 명을 받고 그 공신 위징등의 인물에 의하여 편찬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태종과 위징은 수양제에 대한 반란에 결기하여 수양조를 타도한 이들이기에, 당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주장하기위해서는 수양제의 폭군적 이미지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양제에게는 폭군으로 간주되는 면 이외의 사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서에 적혀있는데로, 당왕조가 원하는 데로 무분별한 폭군이 되어버린것이다.
당태종의 경우 수양제와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의 시기가 다른 시기에 비하여 나은 점이 많았던 시기였다고 하여도, 월등하게 뛰어난 시기는 아니였을것이다. 허나 과거가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 것은 그의 사료가 그렇게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생전에 황제의 언동을 기록한 기거주를 보고 싶어 하였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다. 즉 그는 생전에도 그의 삶에 대한 기록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보아 그의 정관에 치에 대한 것에도 윤색이 있었다는 의심을 품어볼 수 있다. 632년 태종에 백관이 봉선요청을 하였으나, 위징이 반대하였다. 그 이유로 위징은 “수말대란의 뒤를 이어 호구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고, 곡물 창고는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런데 봉선을 위한 행차와 그에 따른 청승만기 또 그것들에 드는 비용은 막대하여 인민은 이를 견뎌낼 수 없습니다. 지금 낙양에서부터 바다에 이르기까지 연기는 드물고 잡초만 무성합니다.” 자치통감 권 194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일이 있기 전 태평의 모습이 있었다는 기록 또한 있다. 이는 당태종에 의하여, 그에 대한 기록에 윤색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Ⅲ. 꼬리말
이제까지 수양제와 당태종에 대하여 파악하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당태종이 이룩한 정관에 치가 사실은 수나라의 바탕아래에서 가능하였다는 것이다. 수나라의 남북의 운하와 과거제도를 이용하였고, 북위 이래로 이어온 균전과 조용조, 부병제가 이미 존재하여 나라의 기틀이 만들어 졌으며, 내외의 위협도 이미 제거되어 황제의 행동이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던 시기였다. 즉 수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기에 또한 당나라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즉 당태종은 수양제의 발판위에서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두사람의 인연은 참으로 깊다고 밖에 생각이 들었던 부분이었다.
두 나라의 두 황제, 수양제와 당태종은 서로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였던 사람 이였으나, 두 사람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극명하게 하게 차이를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사료의 역사서술방법의 차이에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양제의 폭군적 이였던 모습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며, 당태종의 잘 한점 또한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였을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평가를 가지는 것은 분명 역사서에 적혀 있는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른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문득 어떤 수업에선가 들었던 교수님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었다. “과거는 기억이라기보다는 해석이다” 그 당시 그 이야기를 듣고 시큰둥하게 들어 넘긴게 컸었는데, 이번 수양제와 당태종에 대하여 비교를 하면서, 많은 부분 깨달게 된 것이 있었으며, 역사를 공부하는 한명의 학생으로서, 그리고 후에도 역사에 대해서 공부를 계속하려고하는꿈을 가진 이로서 느낀 점이 많은 조사였다.
Ⅳ. 참고 문헌
중국의 역사, 혜안, 누노메 조후저, 임대희역, 2001
허드슨 강변에서 중국사를 이야기 하다. 푸른역사, 레이 황저, 권중달역, 2001
중국의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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