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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七十三回 討成德中使無功 策魏博名相定議
제칠십삼회 토성덕중사무공 책위박명상정의
第七十四回 賢公主出閨循婦道 良宰輔免禍見陰功
제칠십사회 현공주출규순부도 양재보면화현음공
第七十五回 却美妓渡水薄郾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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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 대봉예가 당시 발해의 국세 가 신라보다 강성함을 들어 발해가 신라보다 우선하여야 한다고 당 소종에게 요 구하였다. 그러자 소종은 이것을 거절하고 신라 우선의 옛 관습대로 하였고, 이 러한 소식에 접한 최치원이 당 소종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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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래하면서 무역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길은 고구려가 신라로 내려오던 통로였다.
신라는 통일을 이룩하고 내정이 안정된 뒤 일본을 얕보았다. 일본의 침구가 뜸해지기도 하였으나 신라는 일본에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예전과 달라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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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도 는 고구려계 사람으로 발해는 이 반란을 지지하였고(동족의식+국가적이익) 신라는 당의 편을 들었다.(신라 하대 정치 세력의 이해 관계)
⑤ 발해 멸망기의 남북교섭(905-926)
대립관계에서 다시 우호관계로 변함->발해의 마지막 왕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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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元聖王) 4년(812)이었다. 이들 두 왕은 모두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들로서 국내외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발해와의 교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헌덕왕11년(819), 당에서 일어났던 고구려계의 이사도반란 토벌에 당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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