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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에 진출, 예조·이조의 좌랑 등의 육조 낭관직, 사간원정언·사헌부지평 등의 대간직, 홍문관교리·부제학 등의 옥당직, 승정원우부승지 등의 승지직 등을 역임하여 중앙관서의 청요직을 두루 거쳤다. 아울러 청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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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좌랑에 임명되다.
1568년(선조 원년) 33 세, 11월에 이조좌랑이 됐으나 외할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고는 벼슬을 버리고 강릉으로 내려오다.
1569년(선조 2년) 34 세, 7월에 조정에 돌아오다. 10월에 휴가를 얻어 강릉으로 돌아와 외할머니 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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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에 빈민아(남자
70명, 여자 20명)들에게 노작교육을 실시하였으나 2년 후에 경영의 실패로 문을 닫았다. 이후 18년간
문필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의 교육사상을 요약한 「숨은이의 저녁 때」와 그의 교육사상 즉,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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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초(鐵馬山樵). 가톨릭 세례명 요안.
시호 문도(文度). 광주(廣州) 출생.
1776년(정조 즉위)남인 시파가 등용될 때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상경, 이듬해 이가환(李家煥) 및 이승훈(李昇薰)을 통해 이익(李瀷)의 유고를 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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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좌랑 등을 거쳐 1539년에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
명종 초에 풍기 군수와 단양 군수 등을 역임하고, 1552년에는 홍문관 교리 등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1555년 고향으로 낙향하여 도산서당을 세우고 학문과 사색에 전념했다. 명종 말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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