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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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최치원의 삶과 사산비명
3. 사산비명의 내용 분석
4. 사산비명의 문체 분석
5. 사산비명에 나타난 신라관
6. 나가며

본문내용

) 方言의 사용
사산비명 안에는 드물게나마 우리말(방언)이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우리식 언어표현도 나타난다. 이는 우리 것, 우리 언어에 대한 최치원의 관심을 살펴볼 수 있는 단초가 된다.
사산비명에는 자주 우리식의 지명ㆍ사찰명ㆍ국호가 눈에 띈다.
…… 나아가 뛰어난 승개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걸출하다. 좌측의 峰巒은 닭발(鷄足)이 구름을 당기는 듯, 우측의 原은 용비늘이 번뜩이는 듯하다. 앞으로 임하면 메기같은 산이 검게 늘어섰고, 뒤로 돌아보면 봉황같은 묏부리(鳳崗)가 이어져 연달았다.<崇福寺碑銘>
라고 하여 숭복사가 위치한 산천의 빼어난 경치를 설명하였는데, ‘계족’이나 ‘봉망’은 실제의 지명인 계족산과 飛鳳山을 빌려 쓴 것이다. 최치원은 지명을 그냥 옮겨 쓰는 데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지명을 이용하여 산천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륙문은 표현 용어의 선택에 폐쇄성을 갖는다. 이런 제약에도 불구하고, 최치원은 방언적인 요소를 도입하여 일정하게나마 언어적인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母顧氏 嘗晝假寐 夢一梵僧謂之曰 吾願爲阿(方言謂母)之子 因以琉璃爲寄 未幾娠禪師焉<眞鑑禪師碑銘>
여기서 ‘阿’가 방언이고 괄호 안의 ‘方言謂母’가 최치원의 自註이다. 이 주는 약 2,500자로 이루어진 진감선사비명의 유일한 주로, 비문에 夾註로 달려 있다. ‘阿’의 음은 ‘아미’이니, 이는 오늘날의 어미에 가깝다. 이 ‘아미’라는 표현은 꿈에 나타난 범승이 구사한 것으로 되어있다. 사륙문의 특성상 ‘아미’라는 표현보다는 전아하고 한화된 표현을 쓰는 것이 더 일반적이라고 하겠다. 그런데도 다분히 중국적인 사륙문 속에 우리의 방언을 구사한 이유는, 신라를 부모지향, 고국으로 여겼던 그의 의식이 일정하게나마 표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는 표현용어의 선택에 상당한 경직성을 보이는 사륙문을 기술하는 데 있어서, 방언뿐만 아니라 우리의 문화전통 속에서 만들어진 용어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三利之勝緣有待 千齡之寶運無虧<崇福寺碑銘>
여기서 ‘三利’는 경문왕을 가리킨다. 헌안왕이 膺廉의 사람됨이 뛰어남을 알고 사위로 삼고자 하자, 응렴은 미색이 뛰어난 차녀를 맞이하려 하였다. 이때 範敎師가 이를 만류하며, 장녀에게 장가를 가면 세 가지 좋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첫째 헌안왕의 뜻을 따라서 총애를 얻는 점, 둘째 이로 인해 응렴이 왕위를 계승한 점, 셋째 미색이 뛰어난 차녀도 쉽게 차지한 점이다. ‘삼리’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표현인 것이다.
다분히 중국적인 사륙문 속에 우리의 방언을 구사한 이유는, 신라를 父母之鄕, 고국으로 여겼던 그의 의식이 일정하게나마 표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6. 나가며
최치원은 육두품 출신으로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당으로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귀국 후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한 불우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당대 사회의 모순을 인식한 선각자였으나,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고 저항하지 못한 방황하는 선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신라 下代에는 사회, 정치, 경제, 사상적으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빈공과 출신 宿衛學生과 선종, 그리고 호족들은 상호 결속과 협력을 다져왔는데, 최치원이 사산비명을 찬술한 동기도 바로 이러한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왕실에서 호족들과 결탁하는 禪門을 회유하기 위해 禪師들의 비문을 王命撰의 形式을 취하도록 하였는데, 최치원이 사산비명을 奉敎撰한 것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겠다.
사산비명 중 崇福寺碑銘을 제외한 나머지 3편의 碑銘은 모두 불교의 高僧, 그것도 禪僧과 관련되어 있으며, 주로 인물의 행적과 德行을 위주로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崇福寺碑銘은 절이 이건하게 된 배경에 대한 내용으로 나머지 셋과는 내용상 차이가 두드러진다.
사산비명에는 4ㆍ4조 및 6ㆍ6조의 대우구가 절대적이며, 쌍구대와 정대가 많았으나 구사하기 힘든 反對도 상당수 있었다. 이는 결국, 사산비명이 아주 정교한 사륙변려체로 짜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운은 사산비명에서 유, 불, 선 등 광범위한 분야에 걸쳐 수많은 전고를 적절히 구사하여 浩汗하면서도 효과적인 문장을 펼치고 있다. 전용하는 방법 중 제일 많이 사용한 방법이 전절이고 그 다음은 융화였다. 또한 변려문에는 색채에 관한 어휘가 다수 등장 하는데, 이는 고운의 사산비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바이다.
최치원은 당으로 유학하여 중국적인 문화에 동화되었으며 중국적인 한문학을 수입했으므로 사상적ㆍ문학적으로 높은 수준을 이룬 인물이다. 분명 이 과정에서 그는 중국 중심의 사고를 완연히 떨쳐 버릴 수 없었을 것이고, 발해를 적이라고 규정하였듯이 당의 동방 정책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그가 자신의 높은 한문 교양을 동원하여 고국 신라가 문명의 나라임을 뜻하는 많은 이칭을 모색, 구사하였던 공로는 분명 인정하여야 할 것이다. 다분히 중국적인 사륙문 속에 우리의 방언을 구사한 이유 역시 신라를 父母之鄕, 고국으로 여겼던 그의 의식이 일정하게나마 표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 참고문헌
- 단행본
곽승훈,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사산비명 찬술, 韓國史學, 2005
장일규, 崔致遠의 社會思想 硏究, 도서출판 신서원, 2008
- 학위논문
곽승훈, 최치원의 사산비명 찬술에 대한 시론, 실학사상연구 19, 2권 0호, 역사실학회, 2001.
곽승훈, 최치원의 중국사 탐구와 그의 사상 동향 - 사산비명에 인용된 중국역사사례의 내용을 중심으로 - , 한국사상사학 17권 0호, 한국사상사학회, 2001.
김문기, 崔致遠의 四山碑銘 硏究 - 實態調査와 內容 및 文體分析을 中心으로 - , 퇴계학과 유교문화 15권 0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1987.
김시황, 사산비명에 나타난 고운 선생의 동방 사상, 고문연구 10권 0호, 한국고전문화연구원, 1997.
유영봉, 사산비명 (四山碑銘) 연구서설 - 비명을 통해 본 최치원의 신라관과 당시의 문풍 - , 한국한문학연구 14권 0호, 한국한문학회, 1991.
조범환, 新羅 下代 儒學者의 禪宗 佛敎 認識 : 崔致遠의 四山碑銘과 관련하여, 한국선학 2, 한국선학회,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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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27
  • 저작시기20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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