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의 금오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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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 김시습의 생애 ( 1435∼1494 )

2 . 전등신화 - 구우

3 . 금오신화의 작품
① 만복사저포기
② 이생규장전
③ 취유부벽정기
④ 용궁부연록
⑤ 남염부주지

4 . 금오신화의 특징

5 . 금오신화의 문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김시습 (金時習) 은 강릉의 구족 (舊族) 으로서 세종 17년 (1435) 서울 반궁 (성균관) 북쪽에서 충순의 일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생후 8개월만에 글자를 보고 그 뜻을 알았다고 하며, 또 남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고 하여, 집현전 학자 최치원이 기특히 여기고 그 이름을 `시습` 이라 지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3세까지 외조부한테서 ` 정속·유학·소학 ` 등을 배워 글을 짓고, 5세 때에는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향에게 `대학·중용` 등을 배워 신동의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독서하고 있을 때, 단종이 유충으로서 등극하였다가 곧 세조에게 찬탄을 당하였다는 소문을 들은 21세인 시습은 대성통곡하면서 서적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는, 머리를 깎아 중이 되어 금강산에 들어가서 「오세암」이란 암자를 지어놓고 거처하면서 자기의 호를 「설령」이라 하니 그때가 바로 24세였다. 그는 금강산으로 들어가기 전에 노량진에서 사형을 당한 사육신의 사체를 두려워서 아무도 수습하는 이가 없는 것을 개탄하고는, 밤중에 삼각산에 서 내려와 구릉에 매장하고는 올라갔다고 하는데, 시습으로 인하여 오늘날 사육신묘가 있게 되었다고 한다. 광인으로 자처한 그는 남루한 옷을 입고 새끼 띠를 띠고 폐양자를 쓰고는 걸반승으로 돌아다니면서 지처에서 왕태를 연출하였다고 하는데, 하루는 서울 종로 테거리에서 판서 서거정의 행차를 만난 그는 행차를 가로막고 「강중아 그 사이 잘 있었나」고 하였다. 서거정은 웃으면서 응대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놀랬다고 한다. 김시습은 29세 되던 세조 8년 (1462) 에 서차 상경했다가, 효녕대군의 간청에 따라 세조의 불경언해사 업을 잠시 도와 내불당에서 교정을 밭아 보다가, 마지막으로 영남 유람의 길을 떠나 경주의 금 오산을 찾아보고는, `만수궁한`을 위했던 방랑의 생활을 청산하고, 영주의 보급자리를 마련하기 위하여 금오산실을 복책하였다. 이렇게 하여 김시습은 30세부터 37세까지 금오산실에 은거하면서 구우의 ` 전등신화 ` 를 탐독하고, ` 금오신화 ` 를 지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매월당집 금오신화 (이가원 역주, 통문관, 1959)
매월당 김시습연구 (정 설 동, 신아사, 1965)
한국소설의 이론 (조동일, 지식산업사, 1977)
조선시대의 애정소설 (박일용, 집문당, 1993)
한국전기소설의 미학 (박희병, 돌베개, 1997)
금오신화해제 (최남선, 계명 19, 1927)
김시습의 생애와 사상 (정병욱, 국문학산고, 신구문화사, 1959)
현실주의적 세계관과 금오신화 (임형택, 국문학연구 13, 서울대학교, 1971)
금오신화고찰 (금일렬, 조선전기의 언어와 문학, 형설출판사, 1976)
김시습 글쓰기방법의 사상적 근거연구 (최귀묵, 서울대학교박사학위론문,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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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1.17
  • 저작시기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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