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와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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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준하와 박정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장 준 하 V S 박 정 희

■ 7 0 년 대 시 대 상 황

■ 장 준 하 의 문 사

■ 결 론

본문내용

연필심과 반대편으로 오목한 형태의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한 것
- 주삿자국의 경우 짧은 시간에 많은 양을 주사하면 구멍이 커진다고 함
- 부검을 해보면 정확하며 지금도 사체를 보면 탈골상태를 확인해 볼 수 있으며, 후두부의 함몰골절도 확인할 수 있다고 함
■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정말로 장준하씨의 사인이 실족사가 아닌 누군가에 의한 타살이라면 그는 왜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가?
장준하씨는 ‘사고’를 당하기 전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앞둔 사람처럼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신변정리를 서둘렀다.
그 하나가 상해 임시정부 청사에 게양했던 태극기를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한 사실이다. 이 태극기는 장준하씨가 생명처럼 아껴왔던 것이다. 그가 태극기를 소중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이 태극기 앞에서,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가슴에 품고 상해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치르던 날 아침, 김구선생과 윤봉길 의사가 식사를 하고 결별식을한 유서깊은 태극기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역시 변고를 당하기 며칠 전에 부인 김희숙 여사와 갑자기 천주교 혼례의식을 치렀다는 사실이다. 1943년 김여사와 결혼하고 며칠 후 학도병에 끌려가면서 ‘돌배게’라는 암호문으로 자신의 탈출 사실을 알린 이래, 독립운동과 광복후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주도하면서 꼭 32년만에 다시 천주교 혼례의식을 치러야 할 만큼 그는 무언가 엄청난 계획(거사)을 앞두고 신변정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셋째, 8월 8~9일경부터 망우리에 있는 부모님의 묘소와 김구선생, 이범석 장군의 묘소를 찾아 참배한 점이다.
이러한 장준하씨의 신변정리와 재야 민주인사들과의 은밀한 접촉이 박정희 정권의 첩보망에 걸려들지 않았다면 그것이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광복 30주년이 되는 1975년을 맞아 비장한 결심을 굳힌 장준하씨는 신변정리를 하는 한편 김대중함석헌 선생등과 은밀히 만나 815를 기해 무엇인가 중대한 행동을 결행하려는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 중대한 행동은 재야의 대표적인 민주인사들이 나서서 유신체제로부터의 민주헌정질서로의 복귀를 요구하고, 시민불복종운동을 전개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장준하씨는 거사 예정일을 8월 15일로 잡고 추진하다가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동남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인 20일 경으로 연기했다고 한다. 즉, 재야와 신민당이 한몸이 되어 박정희 정권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히려는 것이 장준하씨의 당초 계획이었던것 같다.
이와 같은 전후사실을 살펴보면 장준하씨의 심상치 않은 행동을 추적하던 정보기관에 의해, 그가 8월 17일 등산길에 나선다는 사실을 알고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실족사를 가장한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추측이 든다. 박정희 정권은 그의 강직한 성품으로 보아 그를 회유하거나 저지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하고 이런 사건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있다. 불과 한 해전 김대중 선생을 동경에서 납치하여 토막살해하려다 실패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치밀한 계획으로 이런 사건을 계획했을 가능성도 농후하다고 본다.
결 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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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하선생은 앞에서도 살펴본것 같이 암울했던 70년대에 정면으로 도전한 실천적 민주주의자였다. 이런 그의 죽음에 대한 의문점을 아직도 밝히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적, 사회적 후진성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수 있다. 장준하선생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물론 개인적인 억울함을 덜어내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다시는 우리의 역사 가운데 의문의 죽음의 더 이상 반복되는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또한 장준하 선생 사인의 진상을 밝히는 것은, 이를 시발로 백범 암살등 과거 건국 초기의 정치적 암살 사건들과 그후 독재정권하의 각종 의문사에 대한 진상도 명쾌히 밝혀, 은폐되고 왜곡된 민족사를 바로잡고 이를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우리조가 장준하선생의 의문사 장소를 찾아가서 살펴보았지만 추락지점에 있던 푯말은 여름장마때에 유실되는등 그동안 있었던 의문사 규명 노력이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또한 의문사하기전 장준하선생과 모종의 거사를 계획했다고 추측되는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된후 의문사 진상노력이 오히려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쉬움이 더 커졌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인터넷등에서 장준하 선생의 저서나 생전의 모습등을 통해 그의 사상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우리 조원들 역시 이번 조사 (특히 장준하와 박정희에 대한)를 해 나갈수록 자신의 편안함보다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는 선생의 모습에 많은 것을 느꼈다.
물론 이 사건은 발생한지 26년정도가 지났고 사건 당사자들도 침묵하고 있어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점이 많다. 그러나 장준하 선생 추모 동지들이 선생이 돌아가신 지 한달 후에 사고현장에 세운 비문의 내용처럼 먼 훗날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오, 장준하 선생!
여기 이 말없는 골짝은
빼앗긴 민주주의 쟁취, 고루 잘 사는 사회, 민족의 자주ㆍ평화통일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장준하 선생이 원통히 숨진 곳,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이 맨손으로 돌을 파 비를 세우니,
비록 말 못하는 돌부리 풀나무여,
먼 훗날 반드시 돌베게의 뜻을 옳게 증언하라.
※ 참 고 문 헌
김삼웅 - 한국현대사 뒷얘기 - 가람기획 - 1995년 - 40장 박정희, 장준하의 30년 곡절은 부분
김삼웅 - 한국현대사 바로잡기 - 가람기획 - 1998년 - 11장 장준하 의문사 부분
박현채 - 청년을 위한 한국 현대사 - 가람기획 - 1992년 - 241P, 249P
전대열 - 말따로 몸따로- 廣越出版社 - 1991에 -「장준하 죽음의 진상」부분
박현채한상진외 - 해방 40년의 재인식Ⅱ - 돌베개 - 1986년 - 185~186P
舊 민주당(1993년)「장준하선생 사인규명 조사활동 보고서」
사단법인 장준하 기념사업 홈페이지 http://www.peacewave.or.kr/
꽃이 있는 한사랑 홈페이지 http://hansrang.x-y.net/
SBS '그것이 알고 싶다' 중 "재야인사 장준하의 죽음"
-1부 : 암살인가? 실족사인가? (3월 14일 방영)
-2부 : 거사와 암살 (3월 28일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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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05.06
  • 저작시기2005.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95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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