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일제하 민족주의 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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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항일운동-일제하 민족주의 문화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목차<<<

Ⅰ. 서론

Ⅱ. 일제하 문화운동의 등장배경
1.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과정
2. 식민지시대의 시작과 민족주의 운동의 전개
3. 3.1 운동 이후의 일제의 문화통치

Ⅲ. 문화운동의 등장과 논리
1. 민족주의 운동의 부활-문화운동의 등장
2. 《동아일보》의 문화주의
3.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Ⅳ. 문화운동의 전개
1. 물산장려운동
2. 민립대학설립운동
3. 국어운동

Ⅴ. 문화주의에 대한 급진적 비판
1. 사회주의자의 형성과 그들의 인식
2. 문화주의운동(민족개량주의) 비판

Ⅵ. 문화주의 민족개량주의의 한계

Ⅶ. 결론

본문내용

지의 한계를 갖고 있다. 먼저 어디까지나 식민지 체제 내에서의 운동이라는 사실이고, 따라서 식민지 지배하에서의 신교육보급구관습개혁민족자본육성 등의 운동이란 근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에서 지적하였듯이 식민지 지배하에서 신문화건설이라는 것은 일제 지배자들에 의해 한계가 뚜렷이 주어져 있거나, 아니면 그들에 의해 왜곡된 방향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실력양성론이 제기하는 선실력 양성 후독립의 논리는 31운동 당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 위에서 제기된 ‘절대독립’, ‘즉각독립’의 주장으로부터 일보 후퇴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는 민족운동의 수준을 한단계 낮춘 것이었다. 또 문화운동은 겉으로는 선실력양성 후독립을 표방하고 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 자본주의 문명의 수립만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즉 ‘독립’이 이차적인 것이 되어 실력양성이라는 방법에 그 ‘개량’에 매몰되는 개량주의적인 운동으로 전락해갔다. 박찬승, 위의 책, 1994
관제 문화운동(일제가 이끌었던)은 민족개량, 실력양성, 자치였다. 이 중 ‘자치’는 운동가들을 친일권에 흡수하려는 회유책이었다. 자치론이 나오는 배경은 참정론 참정권은 국정에 참가하는 국민 기본권으로서, 선거권, 피선거권, 공무담임권, 국민투표권 등이다.
에서 내정독립론을 거쳐 자치론으로 옮겨오게 된다. 1차대전 후 식민지에서 참정권이 허락되는 방식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본국 의회에 식민지 의원이 참가하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총독 감독아래 식민지 의회를 개설하는 방법으로 자치라 한다. 조선에서 참정권은 전자를 가리키는 경우가 보통이다.
31운동으로 경양된 조선인의 정치의식을 통제할 수 없어서 총독부에서는 조선인이 문화적으로 성숙하고 정치사상이 발달한 ‘적당한 시기’에 참정권을 주겠다고 발표한다. 이후, 이 ‘적당한 시기’를 앞당기자는 참정권 청원운동이 벌어진다. 총독부는 민족노선을 급진(독립)과 점진(자치)으로 분열시키고, 급진파를 점진적 타협노선으로 유도하기 위해서, 자치라는 미끼를 이용한 것이다. 사실 자치론은 “일본의 국법이 허락하는 범위 내”라, 통치권을 긍정하고 수용한다는 태도이다. 더구나 독립운동이 “조선 내에서 허하는 범위 내”이지 않으니 곧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이다. 임종석, 위의 책, p.165
Ⅶ. 결론
1920년대 문화운동의 단지 그 시대 사회진화론이이라는 사상 조류에 의해서 형성된 것뿐 아니라 그 뿌리는 구한말 급진 개화파의 논리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당시 조선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의 문물과 근대제도를 들여오려고 노력했던 지일파(知日派)였다. 이 흐름은 애국계몽운동으로 이어지고 20년대 들어와서 문화운동이 잇게 된다.
당시는 아직 민족주의자의 성향이 명확히 분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문화운동을 진행하면서 사회주의 세력의 문화운동에 대한 비판과 일제의 민족주의인사에 대한 끊임없는 회유는 민족주의자를 타협/비타협 혹은 좌/우파로 운동가들의 성향이 드러나게 된다. 분화되기 전에 그들이 함께 문화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조선민족에 대한 전제가 같았기 때문이다. 문화운동 이전에 31운동을 하면서 그들은 독립이 쉽지 않음을 깨닫고 민중에 대해 독립을 위한 장기계획을 필요로 했다.
동아일보는 문화주의를 제창하여 민족주의자들에게 실력양성운동의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일제는 당시를 민족주의자를 분열시킬 수 있는 호기(好氣)로 삼았고 운동의 측면에서 개입하고 친일지식인으로 흡수하려 하였다. 운동논리에 내재된 문제점과 운동주체의 분열, 외부 좌익세력의 비판은 문화운동을 실패로 이어지게 했다.
문화운동의 과정에서 그리고 운동 실패 이후, 일제와 타협하는 세력이 생겨나는 데 이들의 논리는 일제가 식민지 민중을 동화하기 위해 만든 논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더 이상 그들은 ‘타협적’이라는 수식어를 달더라도 ‘민족주의자’일 수 없었고 친일세력이 된다. 앞서 언급한 문화주의, 계몽주의가 지금도 영향을 주고 존재 하듯이 이들 친일세력은 해방 이후로 계속해서 역사의 잔재로 사회에 문제를 일으키며 청산되지 않고 있다.
항상 어느 시대나 개인 혹은 국가에 역사적 요청을 구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 개인에게는 어떤 상황이든 그가 살아있고 그의 운동(움직임)을 결정하기 위해서는 역사의식을 요구한다. 19세기 말에는 시대는 조선이 근대화를 요구했지만 상응하지 못 함에 타 민족의 압제에 고통 받았다. 우리의 현대사를 돌이켜 보면 친일청산은 해방직후에 해야 하는 작업이었지만 50여년이 미뤄져 그 일은 더 고되고 이제는 세대의 교체로 기억에서 지워지고 있다. 지금의 시대는 역사적 모순을 우리 사회의 성격에 더 이상 내면화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역사 잔재 청산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덧붙여 문화운동과 친일의 상관성에 대해 더욱 심도 있게 규명하고자 하였으나 구체적인 자료를 찾기가 어려워 언급하지 못한 점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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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한말, 일제시기 사회진화론의 성격과 영향」,『역사비평』32, 역사문제연구소, 1996
박찬승,「식민지시기 조선의 자유주의와 이광수」,『한국사학』17호, 정신문화연구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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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민중운동사서술분과,『한국근대민중운동사』, 돌베개,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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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승, <국내민족주의 좌우파운동>, ≪한국사≫15, 한길사
박성진, <일제하 사회진화론의 변형과 민족개조론>, 한국민족운동사,《한국민족사연구》제17집,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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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02.10
  • 저작시기20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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