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사]조선시대 여성의 美의식 조사-화장문화를 중심으로 (A+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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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화사]조선시대 여성의 美의식 조사-화장문화를 중심으로 (A+리포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1. 들어가며
2. 화장의 개념정리

Ⅱ. 본론
1. 상고시대(上古時代)
2. 삼국시대(三國時代)
가. 고구려
나. 백제
다. 신라 (*통일신라)
3. 고려시대(高麗時代)
4. 조선시대(朝鮮時代)
가. 조선시대의 얼굴과 관련된 특징
나. 화장 문화
다. 계급에 따른 분류
라. 일화
5. 개화기(開化期)

Ⅲ. 결론

본문내용

이용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는 구하기 쉽고 위의 피부를 희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기생과 같은 천민들이 많이 사용하였다.
다. 계급에 따른 분류
- 기녀들이 하던 분대 화장
백분을 얼굴에 하얗게 바르고 입술과 뺨에 연지를 붉게 칠한 후에 눈썹은 진하게 칠했다.
백분은 쌀가루로 만들기도 하였지만 활석이나 백토, 황도를 섞어 만들기도 하고 분꽃씨를 가루내어 쓰기도 했다. 그러나 얼굴에 부착이 잘 되지 않아서 부착이 잘 되도록 납을 섞어 쓰기도 했다. 이것은 납의 독성 때문에 얼굴에 부작용이 심해서 화장을 진하게 해야 하는 기녀들은 나이가 들수록 피부에 기력이 심하게 손상되는 일이 많았다.
- 여염집 아낙들의 화장법
기녀의 진한 화장을 천박하게 여기고 경멸하여 기녀와 혼동되지 않도록 거의 표시가 나지 않도록 엷은 화장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복숭아 빛 분을 바르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 궁중에서의 화장법
여염집 아낙들이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단지 혼례 때는 볼에 연지나 곤지를 바르지 않았다. 그리고 납분을 바르지 않고 비싼 진주분을 사용했다. 또한, 얼굴을 하얗게 만들어야 예쁘게 보인다는 생각하는 것도 다른 아낙들과 다르지 않았다.
계층
종류
궁중
양반 평민
기생
분백분
진주가루를 사용
쌀가루, 활석, 백토,
황토를 섞어 사용
분꽃씨 가루도 사용
백분에 납 성분이
함유된 것을 사용
눈썹
색을 연하게 칠하는 경향을 보임
(궁중에서는 고급 재료인 유연을
받아 평자의 기름에 갠 것을 사용)
색을 진하게 사용
연지<혼례시>
사용안함
사용함
사용함
비누<세안>
외국에서 유입된
고가의 비누 사용
(고려시대 때 유입)
녹두와 콩을 사용한
조두나 창포물 사용
잿물 사용
(신분 때문)
화장법
염장
담장(평상시)
염장(멋부리기)
야용
라. 일화
연산군이 우리나라 역사에 남긴 공과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가 흔히 알기로는 연산군 하면 흔히 여색을 즐긴 폭군으로써 후일 그의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 중종에게 쫓겨난 난폭한 군왕으로만 전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연산군의 업적을 인정하고 있는 학자들 까지도 그가 여색을 좋아했고,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미녀를 뽑아 궁내에 뽑아 놓고 이들에게 화장을 장려하며 화장법을 개발하도록 국책으로 명령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부인하려 하지 않고 있다. 연산군이 여자를 몹시 좋아한 까닭에 그가 왕으로 있던 기간중에 우리나라 향장품이나 화장술이 크게 발전했다.
명성황후에게 어느 외국인 여성이 외국의 분을 선물한 일이 있는데 명성황후가 “아무리 발라봐야 그게 그거다.” 하며 피부가 하얗게 되지 않아 신통찮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왕족, 평민 등 모든 여성이 흰 피부를 갖는 것을 가장 중요시 하였다.
또 다른 예로 궁궐의 여자들이 예뻐지고 싶은 마음에 너도나도 조두를 애용했기 때문에 경복궁에 흐르는 금천이 늘 탁했다.
5. 개화기(開化期)
조선왕조와 서구의 이 같은 화장 문화를 비교해 볼 때 조선시대의 화장품 공업은 수공업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조선 후기에 와서 외국의 화장품 제조기술을 배워들여야 한다는 입장으로 뒤바뀌었다. 이것은 비단 화장품 공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당시 산업전반에 걸쳐 산업화의 싹이 돋아나는 시기에 일본의 상업자본이 조선왕조 후기 사회에 상륙하여 자생적 발전력을 짓밟은 데다 민족 자본의 성장을 완전 전멸시키려 했었던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화장품이 최초로 기업화된 것은 1916년 박승직(현 두산그룹 회장 박용곤의 할아버지)이 만든 ‘박가분(朴家粉’이었다. 1922년 11월 2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문에 ‘화장계의 패왕’, 경성 생산품 품평회 심사장 공학박사의 상을 수상한 박가분은 항상 바르시면(발르시면) 주근깨(죽은깨)와 여드름이 없어지오, 얼굴에 잡티가 없어져서 매우 고와집니다…박가분은 경향 각지 내외국인 신용 있는 포목점과 잡화 상점에서 판매하옵네다.‘라 하면서 박가분의 제조 및 발매처를 경성 연지동 270번지라고 밝혔다.
1922년 국산 화장품 제조 허가 제1호로 출범한 이 백분은 방물장수들에 의해 하루 5만 갑이나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박가분은 두께 8밀리미터 정도의 보루상자에 뚜껑을 덮고 그 위에 동그라미 속에 ‘박(朴)’이란 글자를 넣은 상표를 붙여 대량으로 생산하여 팔았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화장품 제조를 기업화 한 최초의 제품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산 방식이 재래식이었고, 백분은 납 부작용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당시 외래품 선호바람이 있어 1937년 박가분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Ⅲ 결론
화장이란 앞에서 말한바와 같이 선천적인 자신의 용모를 화장품과 미용술로서 수정 보안해서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또한 화장은 아름다움을 추구해서 자신의 용모를 돋보이고, 노화를 방지하려는 인간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느 민족이든 성격과 생활양식에 의하여 짙은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편으로는 외부의 영향을 받아 변모 동화되기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화장은 하나의 자연적 산물이 되었다.
우리나라 역시 각각의 시대에 따라 특징있는 화장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 중 내외법을 중심으로 여성들의 미의식이 발달하게 되었고, 그로인한 화장법이 발달하게 되었다. ‘백의민족’이란 말이 있듯이 얼굴 또한 하얀 것을 가장 아름답게 여겼으며 계급에 따라 화장품, 화장법 등이 달랐다.
현재의 우리가 화장하는 것과 다름없이 조선시대 여성들도 화장을 통해 자신의 미를 표출하고자 하였고, 단지 그 시대의 사상의 차이에 의해 현재와 다른 미인형 및 화장법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이번 조사를 통해서 여성들의 아름다워 지고자 하는 욕망은 시대에 변화 없이 모두가 가지고 있던 특징인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한국 화장 문화사 - 전완길 지음 (효당 출판사)
화장과 화장품 - 김덕록 지음 (답게 출판사)
화장문화와 화장기법 - 김희숙 지음 (청구 문화사)
안방마님 - 전완길 지음 (문학 아카데미)
우리 옛 여인들의 멋과 지혜 - 이성미 지음 (대원사)
유물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 임효택 지음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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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6.11.06
  • 저작시기20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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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7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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