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下代의 政治 ․ 社會的 혼란에 관한 考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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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 리 말

Ⅱ. 新羅 下代의 成立과 貴族社會의 分裂
1. 元聖王系 성립과 왕실의 권력 독점
2. 치열한 王位繼承爭奪의 전개
a. 무열왕계 金憲昌의 亂
b. 원성왕계 내부의 왕위쟁탈전

Ⅲ. 신라 하대末 정치․사회적 혼란과 원인
1.중앙에서 지방으로
a. 景文王家 왕실고착화
b. 眞聖女王代 농민반란의 원인과 결과
-골품제의 모순
-수취체제의 모순과 농민층의 피폐
-지식층의 은둔(六頭品을 중심으로)
-농민반란의 발생
c. 豪族 세력의 성장
2. 후삼국의 성립과 신라의 멸망

Ⅳ. 맺음말

본문내용

호족세력으로 추측했다.
이로써 고려는 신라에 이어 후백제를 통합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통일 왕조를 이루었다. 고려의 건국은 반세기 가까운 후삼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하고 태조 이후에도 고려 초기의 각 지역에 지배세력이었던 호족 세력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일이 고려 왕조의 최대 과제였다.
Ⅳ. 맺음말
이상으로 신라 하대의 혼란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후삼국의 성립부터 고려의 후삼국 통일까지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신라 중대 專制王權은 景德王 말기부터 위험한 징후를 보이더니 결국 780년 奈勿王의 10대손 上大等 金良相이 무열왕계 惠恭王을 죽이고 宣德王에 오르면서 奈勿王系의 신라 하대가 개막되었다. 하대의 개막은 단순한 왕통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통일왕조의 쇠퇴를 의미하는 거대한 사회적 변혁기였다.
하대의 개막과 함께 내물왕계 왕실의 권력독점으로 인해 무열왕계 및 내물왕계 진골 귀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고, 내물왕계의 分枝化 과정을 겪으면서 凡내물왕계 족적 의식이 약화되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무열왕계 김헌창의 난이 발생하는 원인을 제공하였고, 지방 사회의 이원화 경향을 촉진시켰다. 난 이후 즉위한 興德王은 청해진과 당성진을 설치하고 각 小京을 군사기지화하여 지방의 통치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비록 표면상으로나마 왕권은 안정되는 듯 하였으나, 그가 사망하자 원성왕의 長子인 仁謙系의 후손과 次子인 禮英系의 후손들 사이에서 피비린내나는 치열한 왕위계승쟁탈전을 초래하였고 僖康王과 閔哀王 그리고 神武王까지 이어지는 왕위계승쟁탈전은 왕권에 약화를 가져왔다.
치열했던 왕위계승쟁탈전으로 야기된 중앙정부의 극심한 혼란은 지방사회에 대한 통제력 약화를 불러왔다. 中央政府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왕경의 진골귀족층 사이에 만연한 사치풍조는 계속되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골품제의 모순으로 인한 중앙 귀족층의 자기 분열과 대토지 소유 그리고 이에 따른 자영농민의 몰락으로 백성들은 처참한 삶을 영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백성들이 흉년이나 홍수로 인한 기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혼란이 가중되면서 하대 말기로 갈수록 중앙의 진골귀족세력들의 자기도태와 지방통제력이 약화로 인하여 지방사회에서는 새로운 세력들이 대두하였는데 이들은 海上세력, 軍鎭세력, 村主 및 城主, 將軍들로써 羅末의 豪族勢力으로 성장하여 신라 말기를 이끌어가는 시대의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결국 後三國 時代와 高麗로 이어지는 촉매제가 되었다.
그들은 중앙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에 따라 각자의 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하여 지역의 유력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특히 眞聖女王대 농민반란을 계기로 하여 더욱 더 광범위하고 독립적인 세력으로 발전하여 ‘豪族’ 세력으로 성장하였는데 이들은 상호 연합책을 통해 스스로의 세력을 유지 발전코자 하였다. 호족 세력은 결국 후백제와 후고구려의 건국에 일조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종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자신들의 지역적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호족 세력은 스스로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종속된 국가를 배신하고 새로운 국가에 의탁하기도 하였다. 이는 後百濟와 後高句麗를 무너뜨리고 등장한 王建의 高麗 모두 마찬가지 현상이었다. 다만, 신라가 親高麗的인 입장을 견지하고 민심이 차츰 고려에게 쏠리면서 많은 호족과 지방 군현이 고려에 귀부하는 자가 늘어났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930년 고창전투를 기점으로 하여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935년 후백제 내부의 견훤의 아들 간의 왕위계승분쟁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급격한 쇠퇴를 걷게 되었다. 결국 후백제는 936년 황산에서 고려군에게 패하여 멸망하게 된다. 이로써 신라 말기와 후삼국간의 치열한 경쟁과 혼란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고 새로운 통일왕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이상 신라 하대의 시작과 더불어 신라 하대의 사회적 제반에 나타난 혼란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스스로의 능력부족으로 인해 억측스러운 부분이 많고, 또한 방대한 현상에 대해 다루다보니 단편적인 사실로만 글을 채워나간 느낌이 크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 몇몇 중요한 사항에 대해 다루지 못해 더욱 아쉬움을 더한다. 아무튼 비록 많은 아쉬움이 있지만 이번 논고를 쓰면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천년의 왕국을 이어왔던 신라가 새롭게 변혁하기보다 현 체제에 안주하고 스스로 도태되어 과정을 통해 결국 멸망에 이르는 모습은 ‘고인 물은 썩는다’라는 말처럼 현재를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다. 신라의 멸망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진 것이 아니었다. 많은 모순이 누적되어가고 그 징후가 여러 차례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해결책 제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보다 오히려 중앙 중심적이고 퇴폐적인 모습 그리고 백성들의 삶을 외면하는 오류를 행하였다. 이번 신라 하대의 정치 사회적 혼란상에 대한 글을 통해 현실에 安住하는 것은 퇴보를 향한 지름길이라는 사실과 큰 변화를 위해서는 그 이상의 희생과 양보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면 이번 논고를 마치도록 한다.
《參考文獻》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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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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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善榮, 「新羅下代 景文王家 王位繼承과 政治的 推移」, 『新羅文化』第27輯, 신라문화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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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9.04
  • 저작시기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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