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하대 장보고 해상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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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하대 장보고 해상무역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신라의 국제무역의 발달
1. 신라의 해상운수
2. 신라하대의 공무역

Ⅲ. 장보고의 해상무역활동
1. 이슬람과의 무역
2. 당과의 무역
3. 일본과의 무역

Ⅳ. 맺음말

본문내용

마지막 시대이자, 중세사회로의 이행되는 시기인 만큼 가치 있고 중요한 역사적 단계이지만 새로 떠오르는 고려왕조에 매료되어 이 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신라의 멸망은 우리 역사에서 고대사회와 중세사회를 구분 짓는 분수령으로 여겨질 만큼 커다란 사건이다. 신라하대 사회는 천년고도의 역사가 쇠퇴하고 몰락해가는 신라역사상 가장 어둡고 혼란한 시기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어느 시대든지 그 시대를 하나의 모습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는 복잡한 양상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신라하대 사회 역시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인식으로만 파악하기에는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본 논문에서는 신라하대의 혼란하고 어지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도 쇠퇴하는 중앙세력과 비례하여 성장한 지방 세력과 장보고로 대표되는 해상세력에 의해 번성했던 신라하대의 국제무역에 대해서 살펴봄으로써 신라하대 사회를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서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긍정적 측면의 시각에 입각하여 살펴보았다.
신라는 통일 이후 안으로는 산업이 발달되고 밖으로는 대당 교섭이 촉진됨에 따라 문화의 향상과 신라인의 생활 상태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물품 수용의 증대를 가속화시켰으며 이에 따라 무역은 공무역인 조공무역은 물론이고 사무역인 민간 무역도 왕성하였다. 신라는 국운융창(國運隆昌)의 경제적 기초를 대부분 해상무역에 의존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역사상 유례를 볼 수 없는 해상 발전의 성황을 쌓아갔다.
그 중에서도 신라의 민간 해상활동이 가장 활발하였던 시기는 정치적으로는 혼란했던 8∼9세기로, 골품제에 의하여 중앙의 정치 무대에 참여할 수 없는 지방 세력들이 그 시야를 해외로 돌림으로써 그들의 중요한 생활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게 되었던 것으로 그 중심에 서 있던 대표적 인물이 바로 장보고라 할 수 있다.
장보고로 대표되는 해상상업세력이 성장으로 사무역발달의 전성기를 맞게 되면서 기존의 조공형태의 교역은 사무역의 틀로 전환하게 되는데 이로써 신라의 골품체제는 사실상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말하자면 사무역을 통한 장보고 세력의 부상은 곧 신라의 골품제 사회의 해체를 촉발하는 시작이었던 셈이다. 이는 장보고 사후 그의 통제에서 벗어난 전국 각지의 해상세력가들이 독자적인 세력 형성을 통해 상업 자본을 축적함으로써 후일 고려 건국의 인적 및 물적 토대가 된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신라하대 사회가 비록 혼란한 시대였음을 부정 할 수는 없지만,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들은 분명 존재한다. 결과적으로 신라는 멸망하였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신라 말기의 지배층은 흔히 무능과 실정으로 멸망을 초래한 부도덕하고 무기력한 집단으로 여겨져 지나친 비난과 오해를 받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진성여왕 3년 이후의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신라는 50여 년 동안 유지되었고 국가주도의 무역활동은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무역의 중요 거점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9세기에도 여전치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살펴본 바 있듯이 지배층의 자구 노력은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또한 이시기는 우리나라 역사상 민간인들의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이 가장 활기찼고, 이들 신라 무역 상인들과 장보고에 의해 동아시아 세계의 해상무역의 질적 변화가 초래되었다 평가될 만큼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부분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나말여초의 분열과 통일의 과정은 역사와 사회의 큰 흐름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신라의 몰락 과정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너져 가는 국가의 운명 속에서 신라인들이 보여줬던 진취적인 모습과 역동적인 삶의 자세일 것이다.
<참 고 문 헌>
1. 사료
『三國史記』
『續日本後記』
2. 편저서
김문경, 『청해진의 장보고와 동아시아』, 향토문화진흥원, 1998.
김성훈, 『21c 장보고 정신 구현』,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2003.
세계속의한국편찬위원회,『세계속의 한국』,단국대학교출판부, 2008.
손보기 외 공저,『장보고와 21세기』, 혜안, 1996.
윤재운, 『한국 고대무역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6.
윤명철 『장보고 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
최근식,『신라해양사 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2005.
3. 논문
朴秀錫,「羅末海上勢力에 關한 考察:장보고를 中心으로」,고려대교육대학원,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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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헌,「新羅下代社會의動搖」『한국사』3:고대민족의통일,국사편찬위원회, 1984.
<국문초록>
신라는 7세기 중엽 통일제국을 수립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형성하였지만, 8세기 말경에 진골귀족의 도전을 받아 무너지고, 9세기에 들어오면서는 호족들의 할거주의적 지방분권 상태가 시작된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일은 이와 같이 중앙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 세력들이 할거하게 되자, 오히려 대중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으며 놀랍게도 그들은 그 저력을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에 쏟아 넣었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교역권을 형성하고 나ㆍ당ㆍ일 삼국간의 종횡무진 항해하면서 그 주인노릇을 톡톡히 수행했던 것이다. 실로 우리나라 역사상 민간인들의 해상진출과 교역활동이 이처럼 활기찼던 시기는 달리 찾아 볼 수 없다.
8세기 경 신라인들은 동아시아 3국의 교역뿐만 아니라, 세계무역사의 새로운 단계, 즉 동서해상무역의 초기단계에 가담한다. 이시기 아라비아ㆍ페르시아 상인들은 ‘향약의 길’이라고 청하는 바닷길을 통하여 광주와 양주까지 내항하고 있었다. 자연히 이들과 신라 무역업자들의 교역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아라비아ㆍ페르시아 상인들이 지중해나 중동의 해안에서 수행했던 그러한 역할을 동쪽의 세계에서, 그것도 전자에 비해 훨씬 위험한 해상에서 수행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동아시아 세계는 종전의 당을 중심으로 정치적 국제관계에서 교역을 주로 하는 경제적 국제관계로 그 내용이 바뀌어 갔다. 이와 같은 동아시아 세계의 질적 변화를 가져오게 한 주인공들이 바로 신라 무역 상인들이었고, 그 중심에 서있던 대표인물이 바로 장보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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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09.11.24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62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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