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고분의 기원과 변천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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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Ⅰ. 머리말
Ⅱ. 적석총의 기원과 변천과정
1. 적석총의 기원
2. 적석총의 변천
Ⅲ. 석실봉토분의 기원과 변천과정
1. 석실봉토분의 기원
2. 석실봉토분의 변천
Ⅳ. 맺음말

본문내용

면이 함께 묘사되어 있는 반면 집안 일대의 벽화에서는 주인공의 단독 초상화가 보이지 않고,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고분에서처럼 의장을 다 갖춘 행렬도도 집안일대 벽화에는 없다. 또한 사신도 벽화에서 집안일대에서는 벽 전면에 연꽃이나 귀갑 등의 연속무늬를 바탕으로 사신이 그려져 있는 반면 서북지방의 사신도에는 바탕무늬 없이 사신이 배치되어 있다. 벽화에서 보이는 이러한 차이가 시간을 반영하는지 혹은 피장자의 사회적 신분을 반영하는지는 현재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 양 지역 사이에는 벽화 내용에서 이외에도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복식의 경우 집안일대에서는 左인 반면 서북지방에서는 右으로, 원래 우임은 중국 한대의 한족의 복식이며, 중국에서도 좌임은 북방민족의 복식으로 보아 옷깃의 차이로 한족과 북방민족을 구별하고 있어 4세기 중엽 이후 인물 표현의 복식에서 양 지역은 차이를 보인다. 또한 벽화 천정에 묘사된 일월성진에서도 집안과 서북지방 양 지역은 차이를 보이는데, 6세기 때가 되면서 집안지역에서는 성좌형과 신화가 반영된 신격형이 함께 묘사되는 반면, 평양지역에서는 성좌형으로만 묘사되어, 6세기 이후 양 지역이 해와 달의 묘사에서 차이를 보인다. 결국 벽화 내용을 살펴 볼 때 서북과 집안 양 지역은 세부적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같은 시기에 양 지역 벽화에서 보이는 차가 단지 시간이나 신분의 차이에 기인한다고 볼 수는 없을 듯 하다. 이는 벽화의 수용이 한 지역에서 이루어진 후 각지로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선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를 종합해서 본다면,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변화양상을 집안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하류와 대동강, 재령강유역의 서북지방으로 나누어 살펴봐야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전체를 보다 바르게 알 수 있다. 압록강 유역의 변화양상은 석실봉토분 이전 묘제인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벽화분으로의 변화모습을 보이며, 서북지방은 이와는 다르게 평양 일대 존재했던 낙랑의 전축분에서 석실봉토벽화분으로의 변화 양상을 보인다.
집안과 서북지방에서의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변화 추이를 정리하자면, 크게 세단계로 나눌 수 있다. 즉 석실봉토분의 등장시기인 3세기에서 4세기 중엽, 그 확산시기인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 및 고구려 석실봉토분의 전형이 확립되는 5세기 중엽 이후 7세기까지의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3세기에서 4세기 중엽으로, 중심지는 집안 일대이며, 집안일대에서 적석총에서 석실봉토분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석실봉토분은 단실으로 벽화라는 요소가 3세기 중엽에 등장한다. 그러나 서북지방에서는 4세기 중엽 이전에 벽화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고, 단지 벽화 없이는 석실봉토분이 만달산록과 황산남록에서 군집분의 형태로 분포한다. 이 시기 동안 당시 최고 지배층의 무덤은 적석총으로 집안에 조성되었다.
둘째시기인 4세기 중엽에서 5세기 중엽경은 고구려 봉토석실분이 양 지역에서 확산되는 시기이자 벽화분이 본격적으로 축조되는 시기이다. 서북지방에서는 집안지역보다 늦게 안악 3호분과 같은 완성된 복잡한 형태가 등장하며, 서북지방에서보다 일찍 변화가 등장하여지만 적석총과 벽화분이 공존하였던 집안지역세어슨 장군총과 태왕릉 등 대형 적석총으로 미루어 최고 지배층의 무덤은 벽화분 보다는 적석총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오면서 평양의 천도 준비에 따른 양 지역 간의 빈번한 교류로 양 지방의 석실봉토분은 곁칸이 있는 이실분이 집안일대에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무덤의 구조나 벽화내용에서 비슷한 양상으로 변화하면서 보다 다양해진다.
셋째 시기인 5세기 후반에서 7세기에 걸쳐서는 전형적인 고구려 석실봉토분이 완성된다. 즉 방형 현실과 중앙연도를 가진 단실분 구조와 사신도가 벽화 주제로 등장한다. 평양 천도를 계기로 분묘의 중심지는 평양일대가 되는데, 집안에서 이 시기 무덤으로는 집안 오희분 4,5호분과 통구 사신총만이 현재 확인되었다. 6세기경에 완성된 이러한 무덤 형식은 고구려 멸망기인 7세기 중엽까지 계속된다. 강현숙, 1994, 「고구려 봉토석실분의 변천에 관하여」, 『한국고고학보』 31, 한국고고학회.
Ⅳ. 맺음말
지금까지 고구려의 묘제의 기원과 변천에 대해 알아보았다. 고구려 묘제로는 적석총과 봉토 석실분만이 지적되고, 나아가 적석총은 전기의 주묘제이고, 봉토 석실분은 중기 이후에 적석총을 대체한 묘제로 보고 있다. 즉 고구려란 고대국가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묘제는 적석총과 봉토석실분이란 묘제가 사용되고 이는 계기적 전환 및 발전과정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적석총이 압록강 중류 일대에 중심적으로 분포되어, 고구려 중심 강역이 이 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시기의 주 묘제였음을 알게 한다. 반면에 봉토 석실분은 압록강 유역보다는 대체로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집중 분포되어 있어 고구려가 도읍을 평양으로 천도한 후 적석총에 이어 주 묘제로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남석, 2005,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문화」『고구려연구』20, 고구려연구회.
그러나 고구려 고분들은 현재 북한이나 중국에 있으며, 그에 따라 연구하기에 어려움이 따른다. 앞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고구려 고분 연구에 대한 발전이 있었으면 좋겠다.
참고문헌
강현숙, 1999, 「고구려 적석총의 등장에 대하여」『경기사학』3, 경기사학회.
강현숙, 2000, 「石槨積石塚을 통해 본 高句麗 五部」『外大史學』12,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강현숙, 2001, 「古墳을 통해 본 4ㆍ5세기대 高句麗의 集權體制」『한국고대사연구』24, 한국고대사학회.
강현숙, 2002, 『고구려고분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박사학위논문.
고고학연구소, 1975, 『고구려문화』, 사회과학출판사.
김유정, 2007, 『집안지역 고구려 고분군의 분포 및 변화양상에 관한 연구』, 동아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이남석, 2005, 「고구려와 백제의 고분문화」『고구려연구』20, 고구려연구회.
지병목, 2004 「묘제를 통해 본 고구려의 정체성 - 적석묘(積石墓)를 중심으로 - / 토론문」『고구려연구』18, 고구려연구회.
한국고고학회, 2007, 『한국고고학강의』, 사회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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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02
  • 저작시기20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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