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관한 고찰[낙양천도시기 호복문화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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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위 효문제의 한화정책에 관한 고찰[낙양천도시기 호복문화를 중심으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낙양 천도 이전 호복 문화
Ⅲ. 효문제의 한화정책과 낙양천도
Ⅳ. 천도 이후 호복문화의 변화상
Ⅴ.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 [元]宏制衣冠與之. [元]恂竊毁裂, 解髮爲編服左.”
라고 나와 있다. 위 두 인용문에 의하면 북위의 황태자 원순은 효문제의 복식개혁을 받아들이지 않고, 호복 착용을 고수하려 하였다. 여기에서 이 때가 호복 금지 조치가 내려진 지 1년 9개월이 지났어도 효문제의 태자가 이를 어겼다는 점이 주목되는데, 이 사례를 통해 효문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배층들이 효문제의 복식개혁에 반발했음이 여실히 증명된다.
또한 복식개혁에 대한 정책은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도 그리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는데 이는『자치통감』卷142「제기」8동혼후영원원년(東昏侯永元元年)(499) 춘정월무술(春正月戊戌) 조에서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기록에서는 위주(魏主), 즉 효문제가 낙양성으로 돌아와 대모(戴帽)를 쓰고 소오(小)를 입은 부인이 수레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임성왕(任城王) 원징(元澄)에게 아직도 호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꾸중하는 장면이 기록되었다. (호삼성은 모(帽)와 소오(小)가 대북(代北) 부인의 복장이라고 주석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사건이 주목되는 점은 이 사건이 발생한 499년이 효문제가 의복 개혁 조치가 발표된 지 5년이 넘었으며, 효문제가 사망하였던 해였다는 점이다. 즉, 이 사건은 효문제가 시행한 호복금지정책은 그가 죽던 해까지 수도인 낙양에서 지켜지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사건이었다.
그런데 호인들은 왜 여전히 호복 착용을 고집했을까? 이에 대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으로 분석해 볼 수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정치적 측면이다. 효문제의 복식개혁은 낙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책들로부터 소외된 구도(舊都)의 선비족들에게 저항과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불만요소로써만 작용하였다. 즉, 효문제는 자신이 시행한 복식개혁을 포함한 한화개혁에 대한 실시범위를 대개 낙양으로 옮긴 선비족 관료들에게만 한정시킬 뿐, 일반 백성들까지는 포괄시키지 못하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문화적 측면이 있는데 구체적으로 논의하자면 이는 호복의 장점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첫째, 호복은 기사(騎射)에 편했다. 즉, 호복은 기사에 편하게끔 옷이 몸에 바짝 붙도록 했고 소매는 좁고, 바지는 길며 가죽신을 착용했다. 둘째, 호복은 북방의 자연환경에 적합했다. 북아시아 초원지대와 중국 북쪽의 변경 지역은 매우 추웠기 때문에 좁은 소매와 통 좁은 바지, 가죽신은 보온에 유리했다. 또 여름에 많이 자라는 풀 사이를 다니는 데는 합고(合袴)와 가죽신이 편했다. 셋째, 가죽신은 주로 온도를 유지해 주었고 말을 탈 때 복사뼈를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름 모기와 겨울 추위를 막아 주었다. 또 우기에는 방수의 기능을 하였다. 이를 정리해 보면 호복과 가죽신 등은 유목민의 생활인 말타기와 추운 기후, 초원 생활에 적합했기 때문에 각종 금령에도 불구하고 호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복식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Ⅴ. 맺음말
본고는 낙양천도 시기를 전후로 한 북위의 호복과 관련된 문헌자료를 분석 고찰함으로써 대표적인 한화정책으로 손꼽히는 복식개혁으로 인해 호인들의 한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를 규명해보고자 기술한 글이다.
먼저 낙양천도 이전의 호인들은 ‘상의하고’라는 복식구조를 갖추고 있었으며, 이들의 복식의 특징은 발(髮), 모(帽), 좌임(左), 상의(上衣), 고(袴), 대(帶), 화(靴), 고습(袴褶) 등의 구성요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즉, 그들은 예로부터 몸에 딱 붙는 옷, 좌임, 소매가 좁고 밀착된 상의, 가죽 허리띠, 아래는 바지폭이 좁은 바지, 가죽 장화를 신었는데 이는 유목민족의 복식에 관한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효문제는 북위를 중화전체에 군림, 지배하는 제국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494년 낙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다양한 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그가 추진한 494년의 복식개혁은 황제 스스로가 솔선하여 중국식의 복식을 받아들였고, 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비족 관리들에게도 한식(漢式)의 조복(朝服)착용을 요구하였으며, 이 같은 양상이 선비족 전체의 복식으로까지 크게 확장되어 한화(漢化)로써 개혁되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효문제가 시행한 호복금지정책은 자신들의 풍속과 제도를 포기하고 한족의 것을 일방적으로 따르도록 강요당한 황태자 및 선비족의 상류층 사람들에게 불만의 요소로 작용할 뿐,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 정책은 지배층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그리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으며 이러한 현상은 효문제가 사망된 이후에도 계속하여 전개된다.
이상으로 본고를 다시 정리하자면 낙양천도 이후의 호인들의 복식문화를 살펴보았을 때, 효문제의 한화정책 중 중요한 정책이었던 호복 착용 금지 및 한의 복식을 강제 착용케 하는 조치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고,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호복 착용 문제를 중심으로 효문제의 한화정책이 호인들에게 완전히 관철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물론 필자의 주장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호복 착용에 관한 복식문화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호인들의 문화와 생활실상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앞으로 이 방면에 더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후속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참고문헌>
- 단행본 -
서울대학교동양사학연구실,「호한체제의 전개와 그 구조」,『강좌중국사Ⅱ -문벌사회와 호·한의 세계-』, 지식산업사, 1989
이공범,『위진남북조사』, 지식산업사, 2003
궈지엔,『천추흥망 <삼국·양진·남북조> 분열과 통일의 시대』, 따뜻한손, 2005
최진열,『북위 황제 순행과 호한사회』,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위안싱페이,『중국문명대시야2』, 김영사, 2007
-논문-
최진열,「北魏後期 洛陽거주 胡人들의 생활과 문화 -孝文帝의 ‘漢化政策’의 재검토-」,『중국고중세사연구 24』, 중국고중세사학회, 2010
김은경(석사학위논문),「北魏의 中國化政策에 對한 段階的 考察」,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1987
김용문,「북위(北魏)시대의 호복(胡服)연구」,『한복문화 12』, 한복문화학회, 2009
이순원·박현정,「북위 효문제의 복식개혁에 관한 연구」,『한국복식학회지 43』, 한국복식학회, 1999

키워드

북위,   효문제,   한화정책,   낙양천도,   낙양,   호복문화,   호복,   호인,   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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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7.10.05
  • 저작시기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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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35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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