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답사 보고서(환구단 부민관(서울시의회) 성공회성당 배재학당 중명전 구 러시아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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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정동 답사 보고서(환구단 부민관(서울시의회) 성공회성당 배재학당 중명전 구 러시아 공사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환구단(원구단)

2)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부민관)

3) 성공회성당(6월 민주항쟁)

4) 배재학당 역사박물관(구 배재학당)

5) 중명전

6) 구 러시아 공사관

3. 결론 및 후기

4.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본문내용

의 현실을 시인하고 앞으로 공동보조를 취한다는 타협원칙에 동의하였다. 5월 14일에는 제1차 러일협정인 전문 4개조의 베베르고무라각서가 체결되었다. 각서의 골자는 일본이 아관파천과 친러 정권을 인정하고 을미사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시인하는 것이며 그리고 주한일본군 병력의 감원철수 및 동일한 사항의 러시아군 적용 든 러시아외교의 대승리였다. 이에 일본은 다시 야마가타를 니콜라이 2세(Nikolai Ⅱ)의 대관식에 파견, 러시아 외상 로바노프와 타협을 모색하게 하였다. 그들은 5월 28일부터 6월 9일에 걸쳐 비밀회담을 열고 조선 문제에 대한 공동간섭을 내용으로 하는 로바노프야마가타의 정서를 체결하였다. 4개조의 공개조관과 2개조의 비밀조관으로 구성된 이 밀약의 골자는 일본이 제안한 38선 기준의 국토 분할 안을 후퇴시킨 대신, 장래 필요한 경우에 러일 양국이 조선을 공동 점거할 것을 약속한 것이었다. 이러한 러일의 비밀교섭을 알지 못한 조선의 관민은 러시아의 침투를 오히려 환영하는 입장이었다. 그리하여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는 1년 동안 조선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공사와 친러파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그리고 경원종성광산채굴권,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 삼림채벌권 등의 경제적 이권이 러시아에 탈취당하였다. 이밖에도 러시아는 알렉시예프(Alexiev,K.)를 탁지부고문으로 삼아 조선의 재정을 요리하였고 정식조인은 되지 않았으나 러시아황제 대관식 때 비밀리에 열린 로바노프민영환(閔泳煥) 회담에서는 러시아가 5개조의 원조를 약속한 대신 조선에게는 17개조의 이권을 요구하였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열강도 경제적 이권쟁탈에 열중하였다. 열강을 아관파천에 대해서는 정치적 불간섭주의를 표명하였지만 경제적 이권에는 기회균등을 요구하여 전차철도부설권, 삼림 채벌권, 금광광산채굴권 등의 근대시설과 자원개발에 관한 각종 이권을 획득하였다. 일본도 열강으로부터 전매하는 방법으로 이권쟁탈에 참가하였다. 이 때문에 조선의 국운은 다시금 크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
고종의 러시아공사관 체류기간이 길어지면서 국가의 주권과 이권이 손상되자 국내외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고종은 파천 초에 조칙을 내려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현재의 덕수궁)으로 환궁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것은 경운궁이 당시에 수리중 이었으므로 환궁시기를 늦추고 경운궁 부근에 있는 구미공사관의 보호를 받기 위함이었다. 독립협회를 비롯한 여론은 정부의 대외의존자세를 비난하고 조속한 환궁을 요구하였다. 정부의 대신과 각계 요로(要路)에서도 환궁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친러파들의 방해공작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전국의 유생들이 상소운동을 개시하고 장안의 시전(市廛)들이 철시를 단행할 조짐을 보이는 등 여론이 더욱 거세어지자, 고종도 갑자기 환궁을 결심, 파천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에 경운궁으로 환궁을 단행하였다. 환궁 후에 고종은 독립협회의 진언을 받아들여 그 해 10월 12일 황제즉위식을 거행하여 국호를 대한,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여 대한제국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 아관파천의 의의
아관파천은 을미사변을 통해 불법적으로 조선의 정권을 장악한 일본세력에 대한 친러세력의 반발로 초래된 사건으로서 국왕의 무능나약함과 정부지도자들의 파쟁상이 단적으로 노출되었다. 아관파천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침략이 일시적으로 지연되기는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의 자주성과 국력은 크게 손상되었고 열강의 경제적 침략이 심화되었다. 이와 같은 난국을 당하여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민중들의 자주의식이 각성되었으나 이와 같은 움직임도 왕실과 보수집권 세력의 반동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3. 결론 및 후기
우선 평소에 지나다니던 지역에 근현대 건축물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에 놀랐다. 데이트 코스로만 알고 있었던 자신을 반성하면서도 이번 답사가 계기가 되어 자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가보았던 곳 중 여러 곳이 기억에 남지만, 가장 감명 깊었던 곳은 중명전이었다. 중명전은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큰 아픔 중의 하나가 깃들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어찌 보면 가장 수치스럽고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하지만 아픈 역사도 우리 역사의 한 면이기 때문에 건물이나 흔적들을 없애버리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다행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망국의 길로 접어드는 조선의 역사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중명전 이외에도 많이 없어지고 또 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곳들도 있겠지만 지역 개발이나 다른 이유로 일부러 없앤다거나 방치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건물들이 지나온 세월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어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하고 또 앞으로 길이길이 남아서 후대에 지나온 세월을 일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건물들의 흔적을 통해서 이를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후손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은 훼손되지 않게 잘 보존하고 이러한 문화유산들을 활용하여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4.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4 : 서울 경기도』( 신정일, 다음생각, 2012)
-『서울의 문화재』(서울특별시 시사편찬위원회, 경인문화사, 2011)
- 『한국근현대사사전』 (한국사사전편찬회, 가람기획 , 2005)
- 문화재청 www.cha.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 두산백과 http://www.doopedia.co.kr
-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
- 한국콘텐츠진흥원 http://www.kocca.kr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www.aks.ac.kr
- 한국관광공사 http://korean.visitkorea.or.kr
- 대한민국 구석구석 http://korean.visitkorea.or.kr
- 서울 중구 문화관광 http://www.junggu.seoul.kr/to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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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14
  • 저작시기20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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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69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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