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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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조선 사회주의체제 성립사 1945~1961 (34)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민경제 복구 발전 3개년 계획 실행총화’에 의거하여 46-56년 까지의 공식 곡물통계의 확정 - 수정이나 과도 목표가 비판된 예는 없음,
·1959년 김일성의 신년사-알곡 생산의 500만 톤 달성. 전국농업 협동조합 대회는 70만톤 이상으로 달성 결의.(저조한 생산량을 보임)
·농업생산에서 거대 목표 설정의 정책은 완화되지 않음.
(청산리 방식의 효과가 곡물생산에 나타나야 한다는 기본 전제)
·1962년도 실적-효과적으로 달성됨을 발표. 청산리 정신과 청산리 방법의 결실이라 말함.
(식량자급이 아닌 아직도 수입을 하고 있었음,)
·1965년 이후 곡물생산에 관한 목표, 실적을 포함하여 어떠한 숫자도 발표되지 않음,
▶곡물통계와 농업으로부터의 경제 잉여
·구매량과 가격이 통계발표에서 빠져왔음,
·연안계나 소련계 숙청 이후 농촌은 공업의 복구·건설을 위한 자원을 응당한 규모에서 공급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일반화 됨.
2)농업협동조합·당·인민위원회
▶농업협동조합과 리인민위원회
·공식적으로 정부나 지방 인민위원회는 농업협동조합에 대해 지도하는 관계
-농업생산과 관련하여 종래 개인 농민에 대한 지도는 리인민위원회를 통해 수행되었지만 농업협동조합의 경후 상당 부분이 조합을 직접대상으로 하여 수행됨. 여기서 문제가 발생됨.
·종업협동조합간부가 행정간부화 됨: 리 인민위원회의 간부가 농업 협동조합 관리간부를 상대로 하여 관할 리내 주민행정을 수행함으로 주민과의 사업을 대체시킴.
-리 인민위원회의 주민행정 사업체계와 농업협동조합의 조직체계가 혼동되는 결과
-국가 주도 사업의 대중 동원 현실에서 농업협동조합과 보조를 맞추어야 함.
-국가와 사회의 구분이 불 명료: 농업협동조합의 준 국가기관화가 진행됨.
-유급간부의 증가(협동 조합의 관리 간부 증가로)
▶농촌의 당과 협동조합
농촌에 대한 당 사업방식
-국영농업기업소로서 지배인의 ‘유일관리제’
-협동적 소유에 기초를 둔 농업협동조합으로서 조합원 총회와 관리위원회의 ‘민주주의적 관리제도’를 원칙
-개인농민의 의사와 책임 하에 경영하며 인민위원회의 행정적 지도 대상으로.
-농업협동조합당위원장에게 생산에 대한 통제 권한이 부여, 적절한 사람들이 선발, 배치되기 위한 당의 영향력 행사
·농업협동조합의 확대에 따른 리 인민위원회
-행정 기능이 약화, 당 단체의 영향력은 증대됨.
-당 단체가 관료주의가 나타나는 단점 초래.
-제 3차 당 대회; 리당위원회에 대한 규정
·집중지도사업의 과정
-계급정책: 협동조합의 관리 간부 등에게 계급적 기준이 적용.
(노골적 계급정책 , 주민차별화 정책-신 해방지구에서 많이 나타남)
8.소결
▶전쟁 과정에서 김일성의 권력은 강화되었지만, 당내 다원성은 유지됨.
-연안계, 소련계를 중심으로한 반대파(박창옥, 최창익 등)
-소련의 정책적 간섭
-1955.12.농업정책 상 실책의 책임을 싸고 대립(박일우 김열 숙청)
-소련의 개인숭배 비판에 대한 김일성 비판(소련, 중국의 개입으로 수습)
-8월 전원회의를 계기로 소멸, 이후 광범위한 숙청으로 특징지어짐.
-이후 내부 비판 이나 견제로 인한 자기 수정이 어려워짐.
▶전 후 인민군
-중국군의 주둔과 소련의 군사원조에 의해 군사비가 억제, 경제 부흥에 총력,
-민주기지론은 장기적 진지전으로 전환됨.
-농업집단화: 사회주의 농촌진지의 구축(핵심은 제대 군인, 인민군 후방가족 등)
-전 후 해체된 제대군인들이 광범위하게 농촌간부로 배치
▶전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
-전후 사회주의 개조과정에서 조·중간의 긴밀한 관계/
-인민군 재 연안계와 소련계의 숙청이 철저히 이루어짐. 항일 빨치산 전통을 계승하는 무장력
-위로부터의 사회주의적 개조, 중앙당 집중지도 방식
-집단화, 사회주의적 개조과정이나 공업건설은 소련을 모델로 하여 실시
-신 해방지구에서 발생한 집단화 이탈 움직임은 초강경 수단을 통해 수습.
▶체제운용
-주류파의 당 조직 장악,
-농업 집단화에 대한 농업협동조합 내 당 조직에도 농업생산에 대한 통제권이 주어짐.
-당 조직의 권한이 인사 측면에서 강화됨.
▶노동관계
-1956.직업동맹위원장 서휘. 8월 종파사건으로 위축,
▶경제 복구 노선: 소련이나 중국, 동유럽국가들의 원조가 큰 역할, 농업에서 이전된 경제 잉여도 빠뜨릴 수 없었음,
-농업 집단화가 기여함.
-전 후 경제 성장은 노동자 및 주민의 저소득, 농산물 저가격 유지에 기초를 둔 고도의 강행적 축척체제로 실현
질문점과 더 연구할 점
김일성은 6.25 전쟁 실패의 책임을 박헌영과 남로당파에 돌리면서 박헌영과 남로당파를 제거 하였다. 이로 인해 남한의 유격부대는 괴멸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5.12월 2-3일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나타난 반탐오, 반낭비 주의 또한 남로당파를 겨냥한 점도 많았다. 각 당 대회의 차수를 정할 때도 남북로동당의 합당을 역대 대회로부터 배제하였을 만큼, 박헌영과 남로당을 견제하고 있음이 아닌가? 여기서 김일성은 박헌영과 남로당파의 어떤점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박헌영의 재판과정에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2.1956년 중국 공산당 제 8차 전국대회에서 마오와 소련의 미코얀은 모종의 결의-김일성 축출에 관한-를 하게 된다.
김일성은 당시 어떠한 평가를 받고 있었고, 같이 전쟁을 치르는 가까운 나라에서 왜 이러한 결의가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이 또한 8월 전원회의의 결과와 어떠한 연관이 있었는가?
실제로 그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하자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사태가 벌어지고 있음을 미리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는지, 그들이 만약 생각했던 바를 실행에 옮겼을 때의 후폭풍에 관해서는 다른 학자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3.전후 노동력 부족 사태를 맞아 김일성은 여러 경제 복구 노선을 밝힌다. 1954.3.21.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도 경제 문제를 밝힌다. 여기서 ‘유일관리제’를 도입하는데 지배인의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지배인은 누가 임명하는 것이며, 그 자격은 어떠하였는지, 당시 중농이나, 부농, 개인 상공업자에게 가지 영향을 미쳤는지, 그 책임성은 어디까지였는지, 당시 중국의 경제와 비교하여 어떠한 장점이 있었는지에 관해 더욱 연구하여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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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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