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승 - 작가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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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현승 - 작가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김현승의 생애와 활동
2. 시기별 작품경향
3. 시적 특성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형(茶兄) 김현승은 1913년 4월 4일 평양에서 목사 김창국의 6남매 중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가정은 엄격하고 독실한 기독교 집안이었다 부친이 평양신학교를 마치고 제주도 성내교회를 거쳐 광주로 이사하여, 김현승은 광주 숭일학교 초등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형이 있는 평양으로 가서 숭실중학교를 다녔다. 졸업 후 숭실전문학교 문과를 다니며, 그곳의 교수로 있던 양주동, 이효석의 강의를 들으며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그는 겨울방학이 되어서도 기숙사에 혼자 남아 밤늦도록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은」 , 「어린 새벽은 우리를 찾아온다 합니다」 등의 시를 쓴다. 이 시들을 교지에 발표하는데, 이것이 스승인 양주동의 눈길을 끌었다. 양주동은 이 시들을 1934년 <동아일보> 문예란에 발표하게 함으로써, 김현승은 문단 등단의 관행인 신촌문예나 잡지추천 제도와 상관없이 문단에 등장하게 된다.
1935년 《조선시단》과 〈동아일보〉 그리고 교지 《숭전》등에 「묵상수제」, 「유리창」, 「철교」, 「이별의 시」등을 발표한다. 비평가 홍효민이 김현승을 ‘혜성처럼 나타난 시인’이라고 극찬을 하고,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도 그에게 격려와 찬사를 보냄으로써 그의 이름은 일찍부터 시단에 알려졌다.
1936년경 위장병의 재발과 신사 참배 문제로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광주로 돌아와 모교인 숭일학교에 교편을 잡는다. 이후 교회 내의 작은 사건이 신사 참배 문제로 과대돼, 청년 수십 명과 함께 사상범으로 잡혀 재판을 당하고 교직에서 해고되는 등 고초를 치른다. 몇 년 뒤, 광복과 더불어 <호남신문>에서 잠시 일하다 모교인 숭일학교로 복교하여 교감으로 취임한다. 그는 이 무렵「내일」 ,「민성民聲」, 「창」,「조국」,「자화상」등의 시를 발표한다. 1948년 무렵에는 서정주, 김동리, 조연현 등과도 교류하면서 문단활동의 폭도 넓어진다. 1950년에 「생명의 날」, 「가을 시첩」등을 발표한다. 이때부터 그는 인간의 고독이나 허무 같은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진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또한 그의 정신형성에 큰 영향을 미쳐온 것 중의 하나가 기독교이므로, 그의 시 속에 절대적 타자인 신을 확인하고 그에게 더 가까이 가려는 의지가 엿보이기도 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난 뒤에 광주에서 박흡, 장용건, 손철, 이동주 등과 더불어 계간지 《신문학》을 창간하기도 하고, 이듬해 4월 조선대학교 교수로 임명된다. 그러나 자신의 네 살 난 아들이 약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죽는 비극을 겪는다. 이때의 애끓는 감정과 경험이 시 「눈물」의 바탕이 된다. 1955년에는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으로 선출되고 제 1회 ‘도문화상’을 수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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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9.03.14
  • 저작시기2019.3
  • 파일형식워드(doc)
  • 자료번호#109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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