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학예사]한국고고학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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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준학예사]한국고고학 정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구석기(70만년전)
Ⅱ. 신석기(B.C. 8000년)
Ⅲ. 청동기 시대(B.C. 1000년~B.C. 300년)
Ⅳ. 초기철기 시대(B.C. 300년~B.C.100년)
Ⅴ. 원삼국 시대(기원전 100년~ 300년)
Ⅵ. 삼국시대(3세기 후반~668)
Ⅶ. 가야 (3C중엽~562)
Ⅷ. 통일신라

본문내용

만들고 있었다. 당시 김해·부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타지역과 다른 독특한 토기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즉 지역권이나 시간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고배 등의 경우, 소위 부산·김해식의 토기와 이들 지역을 제외한 다른 영남지역의 토기가 서로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었다.
4세기 말~5세기 초가 되면 종래 가야식 토기와 신라양식 토기로 부르던 토기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이후 이들 토기는 당시의 정세변화에 따라 크게 낙동강을 경계로 그 동쪽 지역은 신라양식의 토기(낙동강 동안양식)가, 서쪽 지역은 가야양식의 토기(낙동강 서안양식)가 널리 사용된다.
.
이러한 가야토기는 원삼국시기 회색 경질토기의 전통을 잇고 있는 것이며, 일본에도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의 대표적 토기인 스에키[須惠器]의 발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토기는 보통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하나는 넓은 의미의 가야토기로서, 산화염으로 소성된 원시토기(우리나라 선사시대 토기인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에 후속하는 기원전 1세기후반에서 6세기중엽(가야 멸망 무렵)까지의 적갈색연질토기(赤褐色軟質土器)에다, 섭씨 8~900도에서 환원염으로 소성된 와질토기와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로도 불리는 섭씨 1000도 이상에서 소성된 도질토기를 포함한다. 다른 하나는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로도 불리고, 흔히 가야, 신라 토기로도 불리는 도질토기에 한정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엄격히 말하면 와질토기는 우리나라 고고학의 시기구분에서 원삼국시대(적확히 표현하면 삼한시대 후반대)의 지표적 토기이므로, 도질토기야말로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진정한 가야, 신라토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적갈색연질토기는 삼한시대와 삼국시대의 전 기간에 걸쳐 생산되므로 시기를 구획하는데 유효한 자료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가야토기를 대표하는 것은 도질토기이므로, 이를 중심으로 가야토기 본질에 접근해 보도록 하겠다. 물론 가야토기, 혹은 가야, 신라 토기란 도질토기와 동시기의 적갈색연질토기와 일상토기를 모두 포함하는 것임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토기양식: 정치적 변동 반영.5세기 초 이후
금관가야양식 토기가 소멸하고 아라가야양식 토기의 분포가 축소되는데, 이는 고구려 남정 이후 특히 금관가야의 쇠퇴를 반영한다.
5세기 중엽
대가야양식 토기의 확산은 묘제와 금동제 위세품을 동반하며 대가야가 새로이 가야 후기의 중심국으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562년 대가야 멸망 후에는 토기양식이 신라로 변화하는 바, 가야지역의 신라영역화를 말해주고 삼국시대 토기양식이 정치적 변동을 반영
일본의 가야 유물
4세기까지 일본 각지 고분에서는 토기, 판상철부로 대표되는 금광가야산 문물이 출토된다.
5세기 초부터 금관가야산 문물 대신 신라산 문물이 일본에 이입되다가, 중엽부터 대가야산 문물이 일본에 이입된다.
일본에 금관가야산 문물이 이입되다가 대가야산 문물로 바뀌는 것은 가야의 패권이 금관가야에서 대가야로 교체되었음을 말해준다.
Ⅷ. 통일신라
고대 국가와 문화의 완성기이자 중세로 전환하는 과도기무덤
신라지역에서는 6세기경 고구려와 백제의 영향으로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하여 통일신라시대까지 계속되었다. 평면 사각형의 널방을 부정형(不定形)의 깬돌을 쌓아 올리고 4벽을 내경(內傾)시킨 다음 천장석을 올려 놓았으며 널길이 남벽 동쪽에 치우쳐 있다. 양산(梁山) 부부총, 경주 쌍상총(雙床塚) 등이 유명하다.
이러한 돌방무덤은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후 소멸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분묘의 소형화와 박장과 화장의 유행에 따라, 호화로운 바장품으로서의 장신구는 자취를 감추게 된다.
토기
통일신라 시기에는 토기가 이전 시기처럼 고분에 일괄 부장되는 일이 드물어 토기자료가 극히 영세하다.
경주 이외의 외곽에서 간혹 나타나는 부장 토기와 단독으로 출토되는 뼈단지[골호] 등이 있는데, 근래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토기들은 7세기 후반에서 9세기까지의 토기로서 민무늬토기와 도장무늬토기[인화문토기] 두 종류가 나왔다. 그 동안 통일신라 토기의 특징적인 토기로 불교의 영향을 받은 도장무늬토기를 대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지만, 이것은 특수목적의 토기이며 일상생활에 쓰이던 토기는 아니다. 이 시기 토기는 굽다리접시와 목항아리가 점점 짧아지면서 신라토기의 형태가 점차 소멸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부터 도장무늬토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유약을 입힌 것이 나타난다. 유약은 고온에서 증발하기 때문에 유약을 입힌 토기는 700~800 ℃의 저온에서 구워졌다. 이러한 토기들은 고려 초기 회흑색토기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청자의 발달로 곧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6세기 중엽이후 (진흥왕대)에 고구려, 백제의 돌방무덤이 경주에 들어오면서 토기에도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짧은 다리에 넓은 굽이 달려 있고 네모, 마름모꼴의 작은 굽구멍이 뚫린 굽다리접시와 뚜껑사발(유개합 有蓋盒)이 나타나는 것이다. 통일신라 토기의 가장 큰 특징은 도장무늬(인화문)이다. 그릇에 도장무늬를 찍는 것은 신라시대부터 나타나지만, 통일신라시대에는 도장무늬만으로 그릇의 표면을 장식한다. 또 다른 특징은 굽다리가 낮아지는 것이다. 신라, 가야토기의 구멍 뚫린 높은 굽다리는 진흥왕 때부터 낮아지기 시작하고 굽다리의 구멍도 작아진다. 그리고 그릇의 표면에 녹색 유약을 바르는 녹유(연유)토기도 만들어진다. 이러한 토기들을 통일신라의 토기와 구분하여 통일양식의 토기라고 부른다.
이 시기에 있어서의 토기는 고신라 토기의 태토나 소성방법이 같으나 기형과 문양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태토라는 것은 토기를 빚을 때 원료가 되는 흙을 말한다. 질그릇이나 도자기의 밑감이 되는 흙이다. 토기의 기대나 이형토기 등이 없어지며 또한 고배·장경호 등의 받침이 짧아지는 형태로 변하고 있고 뚜껑 꼭지에 있어서도 보주형의 꼭지가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고배라는 것은 굽다리 접시로 접시에 높은 굽을 붙인 잔으로 잔에 뚜껑 받이가 있는 형식과 없는 형식이 있다. 신라, 가야 고분에서 주로 출토된다. 장경호는 긴 목 항아리, 긴 목 단지라고도 한다. 목이 그릇 높이의 1/5 이상이 되는 둥근 항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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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2.01.18
  • 저작시기20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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