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신보(基督申報)의 역사와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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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신보(基督申報)의 역사와 가치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1) 기독신보의 창간배경
2) 기독신보의 창간과정
3) 기독신보를 만든 사람들
4) 1920년대 이후의 필화사건
5) 기독신보의 폐간

3. 결론

본문내용

최총호로 발간한 후 폐간했다. 폐간 이유인즉 신문사 총무 김종삼이 신문사의 기본금과 신문 대금 2천4백여원을 유용하여 신문을 그 이상 더 제작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1.2 〈기독신보〉 창간당시의 상황
경술국치(庚戌國恥)이후부터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10년 동안 조선총동부는 한국인들에게는 신문 발행을 허가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건 외국인 명의로 발행을 허가해준 한국어 신문이〈기독신보〉였다. 한일병탄 이후 일제는 “신문지법”과 “출판법”을 적용하여 한국인들의 언론활동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신문지법은 1907년 7월24일에 이완용내각이 법률 제1호로 제정공포한 것이었는데 신문과 잡지등 정기간행물로 적용되었던 법률로 흔히 “광무신문지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정진석, “〈기독신보〉와 한국의 언론문화” 『기독교사상』(1990.6), 143.
총독부는 한국인들에게는 정기간행물의 발행을 허가제로 묶어둔 반면에 일본인들에게 적용한 “신문지규칙”은 제출만 하면 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여 한국 안에서도 일본인과 한국인에게는 차별적인 법률을 적용하였다. 이리하여 신문지법에 의해 한국인들이 발행한 일간지는 경술국치(庚戌國恥)전에는 발행허가를 받은 일간 〈매일신보〉와 월간지 「천도교회월보」 그리고 「중외의약신보」의 3개밖에는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1919년 이전까지 26개의 신문 또는 잡지를 발행하고 있었다. 정보석,『韓國言論史硏究』(서울: 일조각, 1983), 124-26.
2. 〈기독신보〉의 창간과정
1915년 9월7일, 전주서문밖교회당에서 모였던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예수교회보〉의 폐간을 결의한 후, 그 발행권을 장감 선교사통합공의회에 이양하고 다시 감리회와 교섭하여 연합 신문을 발행키로 결의했다.
한편 남북 감리회 연합으로 1911년 1월부터 〈그리스도회보〉를 발행하고 있던 감리교 선교부는 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연합신문 발간 제의를 받고 당장 연합신문 발행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나, 연합한다는 정신만은 좋은 것이므로 일단 수락을 했다. 그리하여 장감의 신문을 연합 발행하게 된 재한복음주의선교사통합협의회(The General Council of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에서는 장감 대표로 게일(J. S. Gale; 기일)선교사와 김필수목사(이상 장로회), 크램(W. G. Cram; 기의남)선교사와 박동완씨(이상 감리교), 조선예수교서회 총무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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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22.10.14
  • 저작시기20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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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18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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