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적 경쟁관계 :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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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제국주의
1. 제국주의 형성과 열강의 식민지 정책
2.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Ⅲ. 국제적 경쟁 관계 ; 제1차 세계대전으로 가는 길
1. 한 세기에 걸친 평화의 종식
2. 세력균형

Ⅳ. 열강의 대립
1. 비스마르크의 동맹외교
1) 슐레스미히-홀슈타인 문제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2) 1866년의 화해와 북독일 연방
3)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독일
2. 외교혁명
3. 3국동맹과 3국협상
4. 양대 진영 내의 긴장
5. 국제적 긴장의 격화
1)범슬라브주의
2)모로코사건
3)세르비아위기
4)발칸문제

Ⅴ. 전젱에 휩싸인 세계
1. 군국주의
2. 민족주의

Ⅵ. 결론

본문내용

다"라고 지적하였다. "확실히 어디에서건 사람들은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2)민족주의
민족주의 역시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세르비아는 인종적·문화적으로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추정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관할권을 확대하는 쪽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당시 터키 영토 내의 두 지방이었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살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남부 지방의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 이었다. 1908년 이후 오스트리아가 갑자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세르비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강력히 대항했다. 대항 방식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슬라브인들의 불만을 유도하는 선동의 형태를 취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슬라브인들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영토를 세르비아와 통합한 것을 기대했다. 그것은 어원 제국(Dual Monarchy)의 평화와 통일을 위협하는 일련의 위험한 음모로 보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에 직접 불을 붙인 것은 사라예보 사건이었다. 부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합병에 대한 슬라브 족들의 분노를 무마시키기 위해 1914년 여름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처가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를 방문하였다. 황태자 부처는 세르비아가 파견한 민족주의자에 의해 암살 당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스트리아 정부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괴롭혀 온 슬라브 민족주의 운동을 응징하려고 하였다. 전쟁 직전에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지원을 확인하였다. 독일은 '백지수표(白紙手票)'로 불리는 무조건 지원을 약속하였다. 자신감을 얻은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였다. 러시아도 즉각 세르비아를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그 뒤로 강대국들은 각각의 동맹 조약에 따라 서로 선전 포고를 하였다. 이로써 그 때까지 유럽인들에게는 가장 크고 잔인한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Ⅵ. 결론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결과 유럽 각국과 미국에서는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하여 마침내 산업 자본주의가 독점 자본주의와 금융 자본주의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이들 선진 열강들은 자국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과잉 생산된 제품을 수출하고 국내에 축적된 잉여 자본을 유리하게 투자할 지역을 해외에서 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들은 적극적인 대외 팽창 정책을 추진하여 마침내 제국주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1870년대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들 제국주의 열강들은 세계 각지의 후진 지역들을 식민지로 영유하고자 하여 이들간에는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에 이르면, 아프리카와 아시아, 그리고 태평양 제도와 같은 세계의 후진 지역들은 대부분 제국주의 열강들에 의하여 분할되어졌다.
이러한 선진 자본주의 열강들의 제국주의 정책은 각국간의 상이한 국익을 바탕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에 이들 강대국 상호간에 치열한 대립과 충돌을 야기하였다. 특히 뒤늦게 통일을 달성하여 민족주의 국가로 출발한 독일과 이탈리아가 후발 주자로서 적극적인 해외 진출 정책을 추진하게 되자 국제 관계는 한층 더 긴장 관계로 치열하게 대립하게 되고, 급기야는 '유럽의 화약고'로 불리던 발칸반도에서의 위기의 폭발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 열강들간의 패권 쟁탈전이었다.
1914년 7월 말 발발하여 1918년 11월 종결된 제1차 세계대전은 이름 그대로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대전란이었다. 전쟁 말기에는 동맹국 측이 4개 국, 연합국 측이 30여 개국에 달했고 이들 국가들의 총 인구수는 15억 명에 달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인류의 생활에 여러 가지 중요한 변화를 수반하였다. 예컨대 국가우월주의와 행정부 우위의 현상이 나타났고,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총력전'의 개념이 처음 대두하였으며, 전쟁 목적에 대한 비판으로 인하여 체제 변혁의 과제가 대두하였으며, 유럽과 기타 세계간의 관계가 전전과는 판이하게 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은 국제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한 시대의 종말, 즉 고전적 제국주의의 시대의 종말을 뜻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뒤 베르사이유 체제라는 새로운 국제 질서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의 '위기의 20년'의 시기에 위기 관리에 실패함으로써 불과 20년만에 붕괴되고 인류는 또다시 새로운 세계대전을 겪게 되었다.
한시대의 종말, 고전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제1차 세계대전은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열강들의 외교 문제에서 발발 하였다.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대립을 중심으로 해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살펴보았다. 유럽의 주요 강대국들은 3국 동맹과 3국 협상으로 갈라져서 사소한 문제를 둘러싸고도 언제나 전면 전쟁이 일어날 위험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실제로 1905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는 1914년까지에 이르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에는 위기와 국지(局地)전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사건들은 모두 세계 대전으로 이끌어 갈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었다. 서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동맹을 맺긴 맺었지만 서로 각국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팽팽한 시선들이 먹고 먹히는 양육강식의 생태계의 모습을 정나라하게 드러내 보였다. 깨지기 쉬운 불안정한 국제 관계 속에서 겉으로는 우위를 다지는 듯 해 보이면서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열강들. 시대가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나라사랑하는 마음들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참고문헌>
단행본
손세호 역, E.M. 번즈, R. 리너, S. 미첨, 서양 문명의 역사Ⅳ, 소나무, 1997
박순식 역, H.M. 라이트,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까치, 1983.
김용자 역, 피에르 르누뱅, 제1차 세계 대전, 탐구당, 1985.
조성을 편역,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집현전, 1990.
김종철 외 역, 홉슨, J. A., 제국주의론, 창작과 비평, 1982.
김진웅, 손영호, 정성화 공저, 서양사의 이해, 학지사, 1994.
이주영, 서양의 역사, 대한교과서, 1992.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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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1.06.21
  • 저작시기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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