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도덕규범의 창안자로서 이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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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는 理와 氣는 다르기 때문에 구별되어야 한다(22:1a). 따라서 사단과 칠정은 다른 감정이다."라고 말한다.
최후의 타협적인 입장에서 퇴계는 理와 氣를 다같이 情으로 보고 그들의 상호 작용을 인정하게 되지만, 그래도 理와 氣를 情의 범주상으로 구별하여 "四端은 理가 발하여 氣가 그것에 따른 것이고, 七情은 氣가 발하여 理가 거기에 탄 것이다(22:14a, 18a)."라고 말한다.
퇴계는 또한 "四端이 외물에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은 七情과 다르지 않지만, 四端은 理가 發하여 氣가 따르는 것이고, 七情은 氣가 發하여 理가 거기에 타는 것이다(22:14a, 18a). 옛 사람이, 사람이 말을 타고 출입하는 것으로써 理가 氣를 타고 운행하는 것에 비유하였는데, 사람은 말이 없으면 출입하지 못하고, 말은 사람이 없으면 길을 잃게 되니 이것은 썩 좋은 비유이다. 사람과 말은 서로 기다리는 관계이지 떨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말하는 자가 '가는 것'만을 말하면 사람과 말이 모두 거기에 포함되니, 四端과 七情을 통틀어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혹은 '사람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말까지 함께 말하지 않더라도 말이 가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되니 四端의 경우가 그것이다. 또한 '말이 가는 것'만을 가리켜 말하면 사람까지 함께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 가는 것도 그 속에 포함되니 七情의 경우가 그것이다(22:14b-15a)."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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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 가지의 가능한 상황을 제시한 후에 퇴계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면서 氣의 특성들을 다시 구별하고, 또한 간접적으로는 사회적 차별도 주장하게 된다.
즉 퇴계는 "맹자의 기쁨(喜), 舜의 노여움(怒), 공자의 슬픔(哀)과 즐거움(樂)은 氣가 理를 따라 발하여서 털끝만큼의 장애도 없기 때문에 理의 본체가 純全한 것입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에 있어서도 … 비록 그들의 氣가 理를 따른다 하더라도 그 氣가 가지런할 수 없으므로 理의 본체 역시 純全할 수 없습니다(22:18a-b)."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기대승 역시 자신의 견해를 수정하여 인간의 기질적 본성이 理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는 퇴계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기대승은 기질적 본성이 선하다는 종전의 견해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끝내 퇴계는 자신의 이원론적인 주장을 고집하고 있지만, 자신의 나약한 견해와 자신이 제기한 반론에 대처하기 위하여 최후에는 타협적인 견해에 도달하게 된다. 즉 "四端은 理가 發하여 氣가 따르는 것이고, 七情은 氣가 發하여 理가 타는 것(22:14a)"이라고 말한다.
후세의 사람들이 계속 논쟁을 할만한 가치를 지닌 많은 논제들을 다룬 이 논쟁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다른 존재의 본성, 理의 우월성, 그리고 氣의 우월성 등에 관해서 최초로 논쟁을 벌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논쟁은 또한 미구에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를 형성시키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른바 七情은 氣, 기질, 인간의 기질적인 본성 등과 동일한 개념이다. 퇴계는 "七情은 본래 理와 氣를 겸하였고, 『중용』과 『맹자』에서는 理를 근원과 기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氣가 아닌 理 속에서 惡이라고는 없는 순수한 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22:2a)."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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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는 "四端과 七情은 모두 情이다(21:26a).",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理와 氣를 분별하지 않고 결부시키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본래적인 선한 본성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22:2a).", "四端은 七情과 구별되어야 하고, 인간의 본성 또한 氣와는 다른 것입니다(21:9b, 22:2b)."고 말한다.
"네 가지의 선한 정(惻隱, 羞惡, 辭讓, 是非)은 네 가지의 타고난 덕(仁, 義, 禮, 智)에서 發하고, 七情과 慾望은 외부의 환경에서 발합니다(21:10a, 22:2b)."
"우리가 未發과 已發의 두 단계를 인정한다면 理와 氣, 그리고 선한 본성(천리와 타고난 선)과 감정을 명확히 구별해야 합니다. 未發과 已發을 염두에 두고 本然의 性과 氣質의 性을 구별하면서 四端과 七情은 왜 구별하지 않는 것입니까?(21:8b-9)"
따라서 칠정은 이기적인 욕망과 잠재적인 惡의 근원으로 간주된다.
"四端과 七情을 명확히 구별하고, 그들이 각각 발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미 주희가 體와 用을 구별한 식으로 그 둘을 구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21:9a). 본성과 氣를 혼동하게 되면 人慾을 天理로 여기는 병통에 떨어지게 됩니다(21:12a, 22:5b)."
"經典에서는 四端과 七情을 구별하고 理의 순수함과 氣의 모호함을 강조했습니다(21:9-10). 理의 본체는 어찌하여 균형을 이루고 있을까요? 내가 보기에는 균형의 상태는 본래 순수한 天理의 상태입니다. 따라서 균형의 상태에서는 우리는 본성만을 말할 수 있을 따름이지 감정은 말할 수 없습니다. 오직 감정만이 발하고, 감정 속에서만 조화와 부조화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발하기 전에는 理가 있을 뿐이고, 이미 발하면 理가 氣를 타고 운행하게 됩니다(21:32b-33a)."
다시 퇴계는 "만약 우리가 氣의 자발적인 발현을 理의 본체로 여긴다면, 우리는 본성과 氣를 일물로 여겨 분별하지 않게 되므로 人慾을 天理로 여기는 병통에 떨어지게 됩니다(22:5a-b)."라고 말한다.
"따라서 四端과 七情은 둘다 理와 氣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지만 그 주된 것을 가리켜 말한다면 어느 것은 理이고 어느 것은 氣라는 말을 왜 할 수 없겠습니까? 四端은 주로 理에서 發합니다. 왜냐하면 仁, 義, 禮, 智의 性이 순수하게 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 七情은 氣에서 발합니다. 왜냐하면 七情은 외물에서 발하고, 외물이 접근하여 옴에 쉽게 감응하여 움직이는 것이 형기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22:3a)."
퇴계가 四端과 七情을 명확히 구별한 것은 사악한 생각의 발출과 마음의 활동에 대한 기질적 본성의 방해를 막고, 특히 주의집중을 통하여 자신을 경계하고 공경하는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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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같이 종교와도 유사한 퇴계의 태도는 그의 학문과 도덕성의 기초가 된다.
(이 원 열 譯)

키워드

성리학,   도덕,   규범,   이퇴계,   신유학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2.04.26
  • 저작시기2002.0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193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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