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과 신문으로 만들어진 우리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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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독립신문이 제시한 언론의 방향
1-1.독립신문이 나올 당시의 사회적 배경
1-2. 창립자 서재필
1-3 언론사에서의 『독립신문』의 의미
1-4 『독립신문』에 담긴 역사의 교훈
1-5 『독립신문』을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과 친일적인 논조
1-6 독립신문의 폐간과 서재필의 추방(?)
1-7 결론
2.국채 보상 운동 속에서 전개되는 신문사들의 활동과 역사
2-1 국채 보상 운동의 배경
2-2 국채 보상 운동의 신문사의 역할
2-3 국채 보상 운동의 결말
3.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의 문자 보급운동
4. 한말에서 현재까지 신문의 보도 용어의 역사
5. 결말

본문내용

지 치하에서 언론이 수행했던 민족 운동사에 남을 빛나는 성과였으며 민족의 앞날에 한 가닥 광명을 던져주는 신선한 장면이었다.
4. 한말에서 현재까지 신문의 보도 용어의 역사
한말의 신문은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으로 양분되었다. 1898년 9월 5일 창간된 『황성신문』과 이듬해 1월 22일에 창간된 『시사총보』가 국한문을 혼용했다. 한말에는 『뎨국신문』과 『황성신문』이 각기 한글 전용과 국한문 혼용을 고수하여 독자층도 양분되었다. 서민들 부녀자와 중류 이하는『뎨국신문』을 많이 읽고 지식층과 상류층은『황성신문』을 주로 읽었다. 문장으로 인해 구독자가 제한될 수밖에 없게 되자 양쪽의 어려움을 해소하고자 했던 노력으로 한자 옆에다 음을 다는 '루비 활자'가 사용되었다. 그 후 1928년 1월부터 『매일신보』는 루비활자를 한자에 음을 다는 방식을 실시하였으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이보다 후인 1970년에는『한국일보』도 한자 제목에 한글로 음을 달아보았지만 역시 오래 가지 못했다.
『대한매일신보』도 1904년 7월 창간 당시에는 염문과 한글전용 신문으로 발간되었으나, 1905년 8월 영문판과 국문판을 분리하면서 국문판은 한글과 한자를 혼용했다. 그러나 1907년 5월 23일 지금까지 발간해오던 국문판과 함께 한글판 『대한매일신보』를 새로 창간하였다. 1907년 7월 18일에 창간된 『매일신문』은 이인직이 사장이었는데 내용은 이완용 내각의 친일 기관지였다.『대한신문』은 또 하나의 친일지 『국민신보』와 나란히 친일 선전을 일삼아 『대한매일신보』와는 격렬한 논전을 벌이는 일이 자주 있었다. 그런데 이인직도 이 해 9월 7일부터 『대한신문』의 한글판을 따로 발간했다. 민족지 『대한매일』과 친일지 『대한신문』은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동시에 발행하게 되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우리말로 발행되는 일간지는 총독부의 어용지 『매일신보』와 일본인 발행의 『조선신보』만 남게 되었다. 『매일신보』는 합방전의 『대한매일신보』를 일제가 매수하여 '대한'이라는 두 자를 떼어 내고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국한문판과 한글판 두 개의 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나 1912년3월 1일부터는 한글판을 폐지하는 대신에 제 3면(사회면)과 제 4면(문화면)을 한글 전용으로 제작했다. 한글판 『매일신보』는 1907년 5월 23일에 창간되어 합방 후 1년 7개월 정도 발행되다가 약 5년 만에 폐간된 것이다.
『매일신보』가 지금까지 국한문 혼용과 한글 전용으로 나뉘어 발행되던 두 개의 신문을 합병하여 이른바 '경파기사'인 정치- 경제 기사를 싣는 1면과 2면에는 국한문을 쓰고, 연파 기사인 사회면(3면)과 문화면(4면)을 한글 전용으로 쓰기 시작한 방법은 우리나라 신문제작의 패턴이 되었다. 그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된 때에는 1~2면은 국한문, 사회-문화면(3~4면)은 한글 전용하여 한국 신문 편집의 전형으로 확립되었다.
1982년 1월 6일부터 『한국일보』는 1단 짜리 안내광고를 모두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동아일보는 1983년 4월 1일 창간 63주년을 맞아 체육 면(8면)을 모두 가로쓰기로 제작하기 시작했다. 이 해 6월 9일에는 사설을 가로쓰기로 바꾸었다.
5. 결말
"독립신문과 한국신문의 역사"라는 제목에, "신문으로 만들어진 역사"라는 주재로 많은 글을 옮겨 보았다. 어쩌면 논지에 벗어난 글들과 정립되지 않아 사변적인 관념과 의욕들로 인해 제목·주재와는 상관없는 글자들의 행렬이 내용보다 먼저 늘어선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 든다. 글을 쓰기 전에 선행되어야 했을 자료 수집과 그에 따르는 공부 그리고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자각에서 나오는 성급한 자기 고백임을 밝히는 것은, 감히 여러 권의 책들 속에 담아 두었을 저자들과 학자들의 견해와 학업적 성과들을 나의 미흡한 이해력으로부터 발생된 오독으로 인해,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굴절된 서술로 그분들의 과오에 누가 되지 않았을까 해서다.
한 분야의 영역을 알아보고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정신들 그리고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굵직한 씨앗을 줍기란 얼마나 어렵고도 벅찬 일이던가. 하지만 지금 현재 내 안에는 분명 형체가 뚜렷하진 않지만 한웅큼의 씨앗이 만져 진다. ―그 넓고 포괄적인 영역으로 머리를 들이밀었을 때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환한 빛이었다. 지나 가버린 시간을 박제시켜 놓은 책(역사) 속의 또 다른 세상 속에서의 신문은 무기보다 더욱 무섭고 또한 아름답고 하나가 되게 하는 응집 제였다. 독립신문이 서재필에 의해 만들어진 후에 그가 남긴 업적들은 서제필에게 향했던 비난보다도 더욱 값지고 큰 것이었기에 후에 나온 신문들이 이어 받아야할 정신, 하나되게 하는 또 다른 응집 제 역할을 했고, 그 후의 만들어진 신문들은 나아가 억압받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민족의 정신과 얼 속에 다시금 하나될 수 있다는 힘을 우리들과 억압하는 시대를 향해 보여 주었다.
지면의 사정상 다 말할 수 없었던 송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 사건에 따르는 『동아일보』, 『조선중앙일보』와 또한 『동아일보』·『조선일보』의 문자 보급운동을 더욱 자세히 말하지 못한 점과 언급조차하지 못했던 것에 섭섭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70년대 80년대의 언론의 폐단과 그에 따랐던 많은 피해 사례를 살펴보지 못한 것들에서도 아쉬움을 가진다 . 본래의 나의 취지는 난무하고 있는 언론사들의 부정적인 면은 이제 그만 말하자는 것이었다. 축척 되어 온 언론의 역기능들이 다른 방향에서의 배움을 우리에게 끌어다 주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오히려 그보다는 신문, 언론에 의해 만들어졌던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를 상기시키며 다른 배움을 찾고자한 것이었다.
지금 보다도 어렵고 억압받는 상황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저널리즘을 공고이한 언론인들이 있었듯, 나 자신 또한 이제부터 더욱 올바른 언론인들과 언론사를 가늠할 수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는 대중의 소양을 갖추고자 한다. 언론(신문)과 대중, 올바른 시대적인 배경이 서로 맞불려 돌아간다면, 우리의 언론도 빈약하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영양에 두 배, 세배의 영양을 살찌워가며 더욱 올바른 나라와 건강한 대중들을 만들어내는 데에 한 몫 단단히 하게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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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4.30
  • 저작시기20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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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3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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