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목적, 역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조직건설, 공군창설계획,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제2차세계대전, 미일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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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목적, 역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조직건설, 공군창설계획,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제2차세계대전, 미일전쟁),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목적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사조직건설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공군창설계획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태평양전쟁(제2차세계대전, 미일전쟁)

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전쟁

Ⅹ.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 독립전쟁 준비에 매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어서 그는 1920년 1월 3일과 5일 이틀간에 걸쳐 개최된 상해 교민 신년 축하회 연설에서 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 등 6대 사업의 추진 방향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안창호는 군사 모집과 훈련이라는 독립전쟁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임시정부에서 추진한 대중시위납세거부日貨排斥訟事拒否 등을 ‘평화적 전쟁’개념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외교에 대해서는 독립전쟁 준비로서의 외교여야 한다고 하였으며, 사법 부문에 있어서는 ‘매국노자치론자참정권론자’에 대한 처벌의 중요성을 언급하였고, 재정 부문에서는 독립전쟁 군자금 모집 방안에 대해 언급하였다.
안창호는 독립전쟁을 독립운동 방법의 핵심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경우, 독립전쟁은 여러 부문운동을 포괄하는 전략적 목표로 설정되었다. 이는 독립운동 방법론을 둘러싸고 분열되어 있는 독립운동 세력을 통일하기 위한 종합적 대책을 마련하려는 고민의 산물로 이해된다.
안창호의 독립전쟁론에 대해『독립신문』에서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 방략을 채택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실제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1920년 1월부로 「국무원 포고」 제1호를 발하여 1920년이 ‘독립전쟁의 제1년’임을 선포하였다. 이 포고는 ‘俄中 兩領의 2백만 동포’에 대해 독립군에의 참여와 독립군 자금의 확보를 독려하는 문서였다. 1919년 12월에 제정된 ‘軍區制’가 간도와 노령 지역 독립군의 편제였던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특히 이 포고문에서는 임시정부 단위의 독립전쟁과 독립외교가 최선임을 주장함으로써 외교와 전쟁을 불가분의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군무부에서도 1920년 1월「군무부 포고」제1호를 발하여 ‘혈전의 시기’가 도래했음을 고하면서 독립전쟁을 위한 광복군 참여를 촉구하였다.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노선의 천명에 발맞추어『독립신문』에서는 1920년 2월 5일「七可殺」이란 제목의 논설을 발표하여 전투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였다. 이 논설에서는 지난 1년간 은 일본에게 悔改의 기간이었는데 이제 ‘恩典의 기간’이 종료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戰時의 敵에게는 사형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여 당시를 전시 상황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따라 敵魁 賣國賊鬼친일 부호적의 관리불량배謀反者 등 7개 대상에 대한 擊殺을 주장하였다. 여기에서 암살파괴 등이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하나의 전술적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Ⅹ. 결론
1948년 2월 16일 김구는 북한의 김두봉에게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협상을 제안하는 유명한 2월 서신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김구는 이렇게 진술했다.
1944년 10월 16일 연안서 주신 혜찰을 배독한 이후 미구에 인형은 압록을 건느고 제는 황해를 건너서 각각 그립든 고국을 차저오게 되었나이다. (중략) 인형이 보고 싶은 때마다 때묻은 보따리를 해치고 일즉이 중경에서 받었든 혜찰을 재삼 읽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나에게 보냈다는 이러한 전문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금년 삼월선생급학무군적 귀함 금십월초재수도 아문금일일절이민족리익위기준 불응유사호성견 아문대선생래연일차적의향무임환영”, 또 나와 각 단체로 보냈다는 이러한 전문도 기록되여 있습니다. “아문불문지역남북 파별이동 성심단결 자사련락 여능촉진회사압록지실현 제위약능동의 연가이종중알선”또 이러한 것이 기록되여 있습니다.
“선생금차신중 ‘연락과 통일을 위하야 노신이 일차 부연하면 중한 양방면이 환영할 가망이 있겠는지?’여기 대하여 우리가 성심으로 환영할 뿐 아니라, 中방면에서도 물론 환영합니다.”
편지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중경의 김구는 1944년 3월 김학무를 통해 연안의 김두봉에게 편지를 보냈다. ② 김두봉은 1944년 10월 초 편지를 받고 10월 16일 이에 대해 답장을 보냈다. ③ 김구가 보낸 편지의 핵심은 중경 대한민국림시정부(이하 임정)와 화북조선독립동맹(이하 독립동맹) 간의 연락과 통일을 위해 자신이 연안으로 간다면 독립동맹과 중공측이 환영하겠는가 하는 것이었고, 김두봉의 답변은민족이익을 기준으로 삼아 김구의 연안행을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김구로 대표되는 임정은 해방을 앞둔 1945년 4월 소해 장건상을 연안에 파견했다고만 알려져 왔다. 그러나 김구-김두봉으로 이어지는 중경 임정과 연안 독립동맹조선의용군의 관계는 보다 깊은 역사적 연원을 갖는 것이었다.
한편 김구의 비서를 지냈던 안우생은 1944년말~1945년초 김구가 김일성에게 이충모라는 밀사를 파견했다고 회고했다.
1944년 말이였다. (중략) 광복의 최후결전에 참가하여 당당하게 환국해야겠는데 ‘림정’으로서는 도저히 힘이 모자랐다. 그동안 답습해온 개인테로방식은 거창한 조국광복전과는 거리가 먼 것이였다. 1942년에 성립된 광복군 설립안은 1945년에야 발효되는 형세였고 그 편제도 병력 몇 십 명밖에 안되는 상징적 존재로서 총 한 방 쏴보지 못하고 광복을 맞을지 모를 실태였다. 백범선생은 이러한 실정에서 몇몇 측근들과 숙고한 끝에 김일성 장군님께 사람을 파견하기로 했던 것이다. (중략) 전설적 영웅 김일성장군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과 어떤 형태로든지 련합을 실현해야 한다는 백범선생의 생각이 굳어진 반공관념까지도 능히 뛰여넘게 한 것이다. 당시 밀사파견은 주변 분위기를 고려하여 백범, 조완구, 나(안우생) 이렇게 몇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였다. 백범선생의 신임장을 휴대하고 출발한 리충모는 산서성 태원까지 이르러 동북에로의 통로를 탐색하느라고 지체하여 중도에서 815를 맞게 된 것이였다.
과연 안우생의 회고는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떤 이유에서 독립동맹김일성빨치산세력과 연대하려 했던 것인가?
참고문헌
1. 고정휴(2004), 태평양전쟁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외교활동, 한림대학교일본학연구소
2. 김지암(2007),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투쟁의지에 대한 홍보,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3. 김희곤(2004),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 지식산업사
4. 이현희(2001), 대한민국 임시정부사 연구, 혜안
5. 이병태(2004),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 전쟁문학사
6. 한상도(2004),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군사간부 양성, 백범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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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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