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통적 윤리의 특성과 행정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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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한국의 전통윤리
2. 구체적 내용
조선조 관료제와 비교한 현행정의 노력의 모습과 비판

Ⅰ.公職倫理의 개념과 한국사회의 不正腐敗
Ⅱ. 한국사회에서 공직의 윤리가 확보되기 어려운 이유
Ⅲ. 公職倫理의 제고방안

본문내용

가운데 주류를 이른 것은 정주 성리학이었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 사이 고려의 조정에는 몇 몇 선진적인 학자들이 원으로부터 정주 성리학을 받아들여 나라의 운명을 건지고 인심을 수습해 내고자 하였다.
1.14세기 정주 성리학
1) 이 시기 한국의 정주학은 사회 개혁파의 이론적인 무기가 되어 역사와 철학의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정도전등은 윤리강상, 천리, 인욕등을 내세워 강력한 보수세력인 귀족들에 맞섰던 것이다.
2)불교에 대한 극도의 배척 또한 당시 한국의 정주학에서 엿보이는 현저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3)이 시기 정주학자들은 불교의 주관적 관념론과 그 밖에 미신으로 가득 찬 온갖 종교들의 주장을 반대하면서 유물 변증법적인 무신론 사상을 적잖이 드러내 보이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
1392년 이성계 일파는 고려를 뒤집고 이씨왕조, 즉 조선을 건국하였다. 새로이 건국된 조선왕조는 자신의 통치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일련의 대내외적인 조치들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고려 말기의 정치 경제적 혼란을 극복하여 안정된 여건 아래서 정치 경제 과학 문화가 발전하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조선 전기는 봉건사회가 더욱 강화되는 시대이다. 고려말기에 새로이 떠오른 사회 개혁세력들은 정주학을 이론적인 무기로 삼아 고려를 뒤집어 엎고 조선을 건립하였다. 조선건국 후 새로운 통치자들은 정주학을 대대적으로 선양하고 적극적으로 보급시켰다. 그들은 이것을 백성을 통치하는 사상적 무기로 삼았다. 이로 인해 정주학은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줄곧 관변철학으로 봉건 통치질서를 유지하고 공고히 하는 역할을 했다.
1)조선 전기의 정주학자들은 "사악한 것을 깨부수고 바른 것을 드러낸다"는 기치 아래 불교 기일원론 양명학 등을 이단 사교로 몰아 세우면서 부정하고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2)조선 전기의 정주학은 일반적으로 중소지주들의 새로운 역량을 대변한다. 그것은 신흥세력인 사림파가 보수 권문세력인 훈구파에 맞서 반대하고 제한을 가하는 데 이론적인 무기로 역할을 하였으며, 사회 역사의 발전에도 어느 정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3)조선 전기의 철학에서 중심이 되었던 문제는 사회와 정치 등 실제적인 데서 차츰 이론적인 데로 옮아 온 것들이다.
이이는 봉건 통치계급의 윤리도덕을 적극적으로 옹호한 사람이다. 그에 따르면 "대체로 때에 따라서 변할 수 있는 것은 법제이며, 예나 지금이나 면할 수 없는 것은 왕도요, 인정이요, 삼강이요, 오상이다. 후세에는 도덕과 학술에 밝지 못하여 변해서는 안 될 것이 변할 때가 있는가 하면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는 때가 있다. 이것이 화평한 날은 적고 혼란스러운 날은 많게 된 까닭이다." 이와 같이 그는 '삼강 오상'을 신성불가침한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본다.
이황과 이이는 똑같이 유학의 윤리도덕 범주 안에 들며 근본적으로는 정주리학의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생각은 꽤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1)윤리 도덕관에서 이황의 사상은 이른바 정통사상이라는 것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이와 달리 이이는 궤도에서 이탈하여 상대적으로 사단을 낮추어 보고 칠정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이는 어느 정도 군자와 소인이라는 등급구분을 타파하는 것으로 일정하게 진보적 의의를 지닌다.
2)인식론 방면에서 두 사람은 비록 "마음 속에 본디 리가 들어 있다."는 선험론을 전제로 하면서도 사단의 내원과 관련해서는 큰 차이를 드러낸다. 이황은 인의예지의 사단이 근본적으로 외부의 사물과 접촉해야 할 필요가 없는 선천적으로 고유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반면 이이는 사단은 칠정과 똑같이 발생하며 외부의 사물과 접촉할 때에만 생겨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
조선 후반기(17-19세기)는 조선 봉건사회가 급속히 쇠락해 가던 시기였다. 16세기 말 7년에 걸친 일본의 침략전쟁을 겪고 난 조선은 전쟁의 참상으로 인해 인구는 급격히 감소하고 경지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사회 경제는 대대적으로 파괴되어 사람들의 생활은 말할 수 없이 곤란에 처해 있었다.
1)조선 봉건집권자들은 위태롭기 그지 없는 봉건통치를 만회해 보기 위해서 정통 정주학에 한 자라도 의심을 품으면 무조건 사문난적이라는 죄목을 덮어 씌워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억누르고 짓밟는 것을 일삼았다. 조선 후반기에는 봉건 통치계급이 날로 부패해지고 당쟁이 더욱 격화되었으며, 정통 정주학은 갈수록 반동화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의 발전과 과학 문화의 발달은 더디어지고 사회의 진보적인 세력들은 비난과 견책을 멈추지 않았다. 양반출신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여기저기서 정주학을 비판하고 나서면서 반정주학적인 사상의 조류를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2)이 시기에 철학논쟁은 학풍, 즉 실제를 떠난 청담공론에 전념하느냐아니면 '실사구시'를 택하느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있었다.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까지 정주리학이 조선에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 조선의 유학자들은 연구와 토론에 온힘을 다 기울었다. 이 결과 정주리학은 조선 봉건왕조의 정통적인 사상으로 자리를 굳혀 사람들의 생각을 규제하고 지배하는 등 조선사회의 이념과 질서를 확립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3)조선 후기의 철학흐름에서 살필 수 있는 또 한 가지 특징은 그 복잡성이다.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조선 봉건사회는 심각한 정치 경제적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봉건 통치집단은 나라의 안위나 백성의 생활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토지의 겸병과 정권과 이권의 쟁탈에만 정신을 쏟고 있었다. 정주학자들은 주희의 경전주석에만 매달려 실제와는 무관한 청담공론에만 전념할 뿐이었다. 17세기 이후 봉건 통치집단은 봉건 통치질서가 혼란스러워지고 통치계급 내부에서도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지자 기강을 바로잡아 통치질서의 혼란을 수습하기에 이르렀다. 그 당시 김장생을 위시한 학자들은 '주자가례'야말로 나라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 하는 가 하면 "예는 천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우리가 따라야 할 법칙이며 그 가운데 "충은 예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예를 바로잡아 봉건 통치질서와 등급제도를 회복하려 들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나온게 실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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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6.10
  • 저작시기20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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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95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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