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의 역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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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강화군
◐ 역사
갑곶돈대(갑곶돈대)
강화산성(강화산성)
강화 하점면 오층석탑(강화하점면오층석탑)
고려 고종 홍릉(고려고종홍릉)
강화 지석묘(강화 지석묘)
참성단(참성단)
전등사(전등사)
삼 랑 성(삼랑성)
정수사(정수사)
정수사법당(정수사법당)
초지진(초지진)
덕진진
광성보(광성보)

대 몽 항 쟁 사
1. 몽고항쟁전의 사회.정치적 배경
2. 대몽항쟁
3. 삼별초의 항전의 의의

개항과 불평등조약
1. 제국주의의 성립과 동아시아 침략
2. 개항과 불평등 조약 체계
3. 개항후 제국주의의 침략과 민중의 대응

양 명 학
양명학파의 수립
강화학파의 학문경향
양명학과 실학파

본문내용

는 농민 특히 빈농의 생활을 위협하여 소빈농과 도시빈민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2)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민중의 대응
제국주의세력 침략에 맞서 제일 민감하게 봉건사회의 보수 지배층인 봉건 유생들이 위정척사사상을 기초로한 개항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항을 전후로 하여 고조된 위정척사사상과 그 운동도 외세침략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는 의의가 있으나 그 운동의 추구점은 봉건제적 사회체제였고 자주적 근대화를 이룩하는 올바른 변혁운동도 아니었기 때문에 기층민중의 반제.반봉건 요구와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제국주의 침략과 외세의존적 겅권의 반동정책에 맞서 전면적 투쟁을 한 것도 제국주의의 침략에 경제적 타격을 입고 있던 농민, 상인, 어민, 광산 노동자, 군인, 도시빈민 등 민중세력이었다. 1882년 구식군인과 도시빈민들이 민씨정권의 매판적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부패한 민씨 정권의 타도와 일본 공사관의 폐쇄 등 제국주의 세력에 타격가했다. 상인들은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제국주의의 경제침략에 반대하여 서울 육의전 상인들이 외국 상인의 서울 철수를 요구하는 철시투쟁을 전개하였고 1891년에는 서울 어물전 상인이 일본 상인의 축출을 요구하는 시위투쟁을 벌였다. 청.일 어부들의 불법적 어업 활동에 의해 자행했는데 일본어부들이 제주도 해역에 잠입해 제주해녀의 어업권과 제주도민의 생존권을 크게 위협하였다. 제주도민들은 이에 집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제국주의 침략에 따라 몰락위기에 처해있던 농민들도 민씨정권의 봉건적 수탈에 반대하는 반봉건투쟁을 반침략투쟁과 결합시키면서 항쟁하였다. 이시기의 농민항쟁은 삼남지역에서 벗어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주목할 점은 화적이라 불리우는 농민 무장단이 출현, 항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제국주의 침략과 민씨정권의 외세 의존적 근대화 노선에 반대한 민중들의 반봉건.반침략투쟁은 아래로부터의 근대변혁을 추구하는 흐름을 이루었고, 도시빈민.상인들의 운동은 만민공동회로, 농민행쟁은 갑오농민전쟁.활빈당투쟁으로 각각 계승 발전 되었다.
陽 明 學
명나라의 王守人에 의하여 주창된 유학의 한 계통으로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학의 현실 방면을 중시한 이른바 실학이라는 신학풍이 대두되었지만 신학으로서의 양명학에 대해서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우리나라 유학사상 유일한 양명학자로 꼽히는 정제두에 의해 강화학파가 형성되었는데 이 때부터 양명학이 발전하기에 이른다.
양명학파의 수립
양명학파가 독자적으로 형성된 것은 정제두에 의해서이다. 정제두는 주자학자들의 학문이 학문하는 것이 아니라 영달과 공리로 흐르는데 반성을 촉구한다. 남을 복종시키는 도구로 사용되는 현황을 반대하였다. 이는 당시의 노론과 소론 등의 파당싸움을 배격한 것이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처럼 이원적인 상응논리에 의거하지 않고 상즉논리에 근본하는 一元論이었다. 즉 하늘과 사람은 심성에 의하여 일원화되어 있으므로 우주와 인생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원론적 사고는 이기와 성정, 인심과 도심, 지와 행, 심과 이 모두가 서로 상즉하는 관계로 설명되며 그 모든 것은 심체의 작용이 아닌 것이 없으므로 이라는 것은 사물의 조리나 이치가 아니라 내 마음의 양지라는 것으로 사물의 이가 그에게는 생명적이며 주체적인 것이라는 것으로서 이기를 일원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이는 마음의 이요, 마음의 기이므로 심에 의하여 통일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의 학문으로 양지론이 있다. 이는 심즉리에 바탕하여 양지는 천리요, 천리는 양지라 하는 것으로 주희가 객관적인 사물에서 이치를 찾는 것(즉물궁리)이 아니라 내 한마음을 사물에서 발휘해 나아가는 것이므로 나의 주체적인 양지를 객관적인 사물에서 실현한다고 하며, 외향과 내향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으므로 우주는 모두 양지가 현실화된 것으로 보고 그 본래성이 양지라고 하였다.
생리(삶의 이)라는 것은 주희의 이를 물리 혹은 헛된 조리라고 반대하여 자기의 이는 삶의 이(생리), 삶의 도리(생도), 삶의 에너지(생기)라고 표현하였다. 그의 생리라는 것은 이목구비라는 육체와 양지로서의 정신적인 것을 통일한 인간본성의 규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곡학의 우경화 : 중국의 양명학파가 신분주의를 타파하고 일반 서민대중에 파급된 것과는 달리 정제두에게서는 그러한 혁명적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다. 그의 가법에 보면 왕수인과 같은 인간의 평등과 존엄사상이 부인되고 오히려 봉건적 신분주의를 옹호한 것으로 따라서 그는 당시의 정주학적인 허위는 미워하였으나 사상적인 혁명성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
강화학파의 학문경향
정제두의 뒤를 이은 강화학파의 학문경향은 다음과 같다.
주체적인 양지사관은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이충익의 군자지과, 이면백의 감서해동돈사, 이시원의 국조문헌, 이건창의 당의통략 등의 업적이 빛나고 있는데, 이종휘의 사관을 노예사상으로부터 주체적 사관을 수립하였다. 고 한 것처럼 그들은 홀로 아는(독지) 양지사관에 근거하고 공평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우리나라 언어인 정음의 연구 도한 주체성을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백하의 서예는 이광사에 이르러 원교체로 창조되고, 이긍익.이충익과 정문승의 서화는 산수화에 뛰어나 근역서화징에 소개되어 있으며, 이광려.이충익.이건창은 모두 이지의 영향을 받은 공안파의 성령문학에 기본을 두고 있으며 이들의 문장론의 기본은 문장됨이 선배의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시세에 구애되지 아니하고(신대우의 이참봉문집서), 실학과 제휴하여 이상학은 정약용을 연구하였고, 신작은 정약용과 교우하였으며, 정문승은 농서에, 정후일은 수학연구에 조에가 깊었는데, 이들은 양지를 상징화하여 문학.언어연구.서예.시화에서 혹은 실학에서 그것을 구체화하였다.
양명학과 실학파
홍대용과 박지원박제가 등 소위 북학파 혹은 이용후생파의 중심인물들은 양명학에 의하여 사상적으로 무장한 것으로 간주된다. 홍대용의 의산문답에서 허와 실의 대결에 관하여 얘기한 것이나 그의 사상 중 대동사상과 교육이론은 양명학과 접근되고 있다 .
박지원의 한문소설에 일관된 것은 이지와 공안파의 문학이론이며, 일상용어로 표현해야 한다는 문장법도 이지가 이미 동심설에서 주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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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7.11
  • 저작시기20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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