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고려의 역사, 고려의 통치체제, 묘청 서경천도운동의 전개, 묘청 서경천도운동과 김부식, 묘청 서경천도운동의 평가, 강화도천도의 배경, 강화도천도의 전개, 강화도천도와 민란, 강화도천도의 문제점 분석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고려]고려의 역사, 고려의 통치체제, 묘청 서경천도운동의 전개, 묘청 서경천도운동과 김부식, 묘청 서경천도운동의 평가, 강화도천도의 배경, 강화도천도의 전개, 강화도천도와 민란, 강화도천도의 문제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고려의 역사

Ⅱ. 고려의 통치체제
1. 고려 중앙 통치 제도의 특징
2. 고려 지방 행정 조직의 특징

Ⅲ. 묘청 서경천도운동의 전개

Ⅳ. 묘청 서경천도운동과 김부식

Ⅴ. 묘청 서경천도운동의 평가

Ⅵ. 강화도천도의 배경

Ⅶ. 강화도천도의 전개

Ⅷ. 강화도천도와 민란

Ⅸ. 강화도천도의 문제점
1. 궁궐과 관아
2. 저택과 民居
3. 방어 시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되찾는 고종 21년 전후의 시기에 본격적 건축사업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최씨정권의 공적을 기리는 국왕의 조서 가운데
“晉陽公 崔瑀는 몸소 乘輿를 받들고 땅을 골라 천도를 단행, 몇 년 되지 않아 궁궐과 관아를 모두 짓고 憲章을 다시 떨쳐 三韓을 再生시켰다.”
([고려사])
이라 한 것도 천도 초기에 궁궐과 더불어 관아건물이 우선적으로 營建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
이상의 몇 가지 사실들을 통해 파악해 보면 강도시대 각종 건축물의 조영은 고종 19년 7월 천도 이후 몽고의 3차 침입이 개시되는 22년 이전까지의 수년간 집중적인 작업이 있었다. 그 후 고종 30년대를 전후한 시기, 그리고 36년부터 대략 40년 이전의 시기 등 주로 대몽항전의 소강기에 계속적인 정비 혹은 신, 개축 작업이 보완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2. 저택과 民居
궁궐, 관아 이외에 지배층의 저택과 개경으로부터 이주한 사람들의 가택도 새로 건축되었을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그리고 그 저택이 극히 광대호화 하였음은, 개경으로부터 재목을 가져왔다든가, 정원수를 본토에서 전부 실어와 수십 리에 달하는 園林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에 의하여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집정자 최우의 저택은 궁궐보다는 규모가 못하였으나, 꽤 컸음을 짐작 할 수 있다. 그가 막대한 재력과 인력을 투입, 저택을 건축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는 의도적인 이유가 작용하지 않았을까 한다. 그것은 천도를 전후한 시기에 노출된 권위의 불안을 의식한 면이 없지 않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당시 궁궐과 관아, 최씨의 저택 등 주요시설은 송악산의 남쪽기슭과 동남쪽 견자산의 북쪽 및 동쪽기슭을 중심으로 경영되었다. 그러면 새로 이주해 온 民居로 말미암아 크게 확대되었을 시내 거주지는 어떻게 형성되어 있었을까. 이 같은 관심을 두면서 주목해 볼 것은 江都時代의 빈번한 화재 사건이다. 즉 강도시대 민가에서의 대형 화재 사건의 多發은 현저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무질서하게 밀집되어 버린 도시구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급작스러운 천도의 단행으로 한꺼번에 대규모 인구가 이입해 옴으로써 계획성 없이 민거가 밀집되었기 때문이다. 강도는 고종 21년을 계기로 보다 왕도의 면모를 갖추는 방향으로 도시가 새롭게 정비되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협소성과 밀집성은 탈피하지 못하였던 듯, 고종 32년의 화재사건은 연경궁, 법왕사 ,그리고 몇몇 관아까지 연소시켰다.
강도의 시가는 대궐 남쪽이 중심가를 이루었다고 보여지고 견자산 북쪽에도 큰 마을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당시의 민가와 시가지는 오늘의 송악산 남쪽과 견자산 북쪽을 연결짓는 선상을 주축으로 하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3. 방어 시설
강화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점에서 몽고군 방어에 큰 지리적 이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건만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강도에는 고려의 주요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강도 방어에 대한 무인정권의 확고한 의지와 입장, 거기에 3중의 성곽이 장치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여러 요소가 강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각각의 요소였던 것이다.
몽고의 병란을 피하여 강화로 천도한 당시의 상황에서 강도의 방어 설비는 궁궐, 관아시설 이상으로 긴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 방어설비의 중심은 역시 강도를 둘러싼 성곽이었다. 강도의 성곽은 내성, 외성, 중성의 3중으로 구축되었다.
내성은 그 성격상 가장 먼저 축조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축조 시기는 천도 초기 궁궐의 영조와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오늘날의 강화 산성과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외성은 그 축조시기에 대하여 고종 20년, 혹은 동 24년의 두 가지로 등장하는데 이는 외성의 시축과 완공의 연대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외성은 대략 5년의 축조기간이 소요된 셈이 되는데 외성의 규모를 감안할 때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다. 그 길이는 내성 길이의 10배에 가까운 장성이었음을 말해준다.
중성은 최항 집권기인 고종 37 년에 構築한 것인데 다음과 같은 단편적인 기록이 전한다.
\"中城을 쌓은 공으로 최항을 門下侍中에 임명하고 晉陽候에 封하고 府를 열도록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高麗史節要]17,고종 37년 12월)
그리고 실제 답사의 결과로 보면 이 중성의 잔적이 가장 뚜렷한 것 같다. 강화도는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점에서 몽고군 방어에 큰 지리적 이점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건만으로 적을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강도에는 고려의 주요병력이 집중되어 있었고 강도 방어에 대한 무인정권의 확고한 의지와 입장, 거기에 3중의 성곽이 장치되었던 것이니 이러한 여러 요소가 강도의 안전을 보장하는 각각의 요소였던 것이다.
강도 방어 상에 있어서 성곽의 중요성과 비중은 두 가지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즉 당시 천도에 대한 칭송 혹은 강도의 안전을 표현한 詩文 가운데 성곽을 자주 들고 있는 점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한 가지는 전쟁 말기 몽고와의 화의가 진행되면서 몽고에 의해 우선적으로 요구되고 실행되어진 것이 다름 아닌 강도 성곽의 파괴라는 사실이다.
한편 몽고측은 강도의 축성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나타내고 있는데 고종 37년 최항에 의해 중성이 새로 축성되자 이 무렵 고려에 온 몽고 사신이 항의를 제기하였다. 또한 몽고의 5차 침입 기간인 고종 40년 적장은 사신을 강도에 파견, 성곽의 파괴를 요구했고, 마침내 고종 46년 6 월 몽고 사신의 감독 하에 고려의 내, 외성이 깨뜨려진다.
참고문헌
고려사의 전이, 삼영사
백남혁,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의 연구, 한성사학회, 한성사학, 1998
이경수, 고려 대몽항쟁기 강도정부의 유지배경, 석사학위논문, 서강대 교육대학원, 2000
윤용혁, 고려의 대몽항전과 강도-강화천도(1232)와 강도경영을 중심으로, 고려사의 제 문제, 삼영사, 1986
정성희, 인물로 읽는 고려사, 2000
金潤坤, 江華遷都의 背景에 關하여, 大邱史學, 1978

키워드

  • 가격5,000
  • 페이지수13페이지
  • 등록일2011.04.07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6435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