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1) 삼별초의 성립과 성격
2) 삼별초의 항쟁
(1) 초기의 항쟁
(2) 진도에서의 항쟁
(3) 제주에서의 항쟁
3. 결론
- 참 고 문 헌 -
2. 본론
1) 삼별초의 성립과 성격
2) 삼별초의 항쟁
(1) 초기의 항쟁
(2) 진도에서의 항쟁
(3) 제주에서의 항쟁
3. 결론
- 참 고 문 헌 -
본문내용
방경군은 삼별초의 지휘부에 있던 김원윤 등 6명을 공개처형하고 35명은 포로로 하는 한편 삼별초의 사졸 1,300여명을 포로로 붙잡아 귀환하였다. 여몽연합군이 추격하여 삼별초는 최후까지 항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에 김통정은 산중으로 들어가 자결하였고 그 시신은 두달 후인 원종 14년 6월에 발견되었으며, 부장 김혁정이기 등 70여명도 잡혀 홍다구에게 보내어졌는데, 모두 참살(斬殺)당하였다.
제주에서의 삼별초군은 진도시대에 비하여 군사력이 약하였고 지리적 측면에서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항전의 장기화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었지만 제주도의 해안지역의 방어지역이 광범위하였다. 또 한가지 삼별초의 항전은 진도시대와 달리 국왕이 없는 상태에서 정통 정부로서의 명분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정부적 성격보다는 하나의 세력집단으로서 그 정치적 위상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삼별초는 군사력 문제와 더불어 정치적 위상의 문제로 제주에서의 세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3. 결론
1270년(원종11)부터 1273년(원종14)까지 약 4년여 동안 한반도의 남부연안 그리고 진도를 거점으로 하는 삼별초의 항전(抗戰)은 40년 고려 대몽항쟁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이들은 몽고에 대한 고려의 종속화를 반대하며 독자정부를 수립하고 대내외적으로 반몽의지를 표방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여.몽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약4년간이라는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抗拒)에 적극적으로 호응(呼應)하여 정부와 몽고군에 대하여 투쟁(鬪爭)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들 사회의 내부에서 높이 고양(高揚)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항쟁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삼별초의 항쟁은 원에대한 고려의 예속화를 묵인하고 종속적(從屬的)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기네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反撥), 항거(抗拒)한 병사들의 폭동(暴動)이며 이것이 당시의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었고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상대로 3년간이나 싸우고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고와 강화한 뒤 민란(民亂)의로 인해 민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왕실, 친몽고파 귀족들과 대립되는 친무인파와 기존의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삼별초의 항쟁의 좌절은 민의 역동적인 사회변화 의식을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14세기 민의 움직임에도 깊은 영향 을 주었다. 삼별초의 항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에서 반외세(反外勢 ).몽고투쟁(蒙古鬪爭0의 긍정적 측면과 무신정권의 기반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은 몽고의 반침략투쟁(反侵掠鬪爭)으로서 나라를 예속화(隸屬化)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반대하는 반몽적(反蒙的) 성격으로서, 또 몽고에 투쟁하여 자주성을 보여주는 민중의 저항정신을 대변한 민중적(民衆的) 성격으로서의 의의(意義)가 크다.
- 참 고 문 헌 -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윤용혁/ 일지사/ 2000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연구2/ 윤용혁/ 일지사/ 2000
- 무인시대와 삼별초/ 유현종/ 대산/ 2003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7
- 고려무인 이야기/ 이승환/ 푸른역사/ 2001
- 삼별초/ 김정한/ 시와사회사/ 1994
제주에서의 삼별초군은 진도시대에 비하여 군사력이 약하였고 지리적 측면에서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항전의 장기화에 어느 정도의 도움을 주었지만 제주도의 해안지역의 방어지역이 광범위하였다. 또 한가지 삼별초의 항전은 진도시대와 달리 국왕이 없는 상태에서 정통 정부로서의 명분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정부적 성격보다는 하나의 세력집단으로서 그 정치적 위상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삼별초는 군사력 문제와 더불어 정치적 위상의 문제로 제주에서의 세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3. 결론
1270년(원종11)부터 1273년(원종14)까지 약 4년여 동안 한반도의 남부연안 그리고 진도를 거점으로 하는 삼별초의 항전(抗戰)은 40년 고려 대몽항쟁의 최후를 장식하였다. 이들은 몽고에 대한 고려의 종속화를 반대하며 독자정부를 수립하고 대내외적으로 반몽의지를 표방하였다. 삼별초(三別抄)가 여.몽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약4년간이라는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남도 각처의 농민들이 삼별초의 항거(抗拒)에 적극적으로 호응(呼應)하여 정부와 몽고군에 대하여 투쟁(鬪爭)하려는 굳은 결의가 민중들 사회의 내부에서 높이 고양(高揚)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민중들의 저항정신이 삼별초의 대몽항쟁과 서로 동조하게 된 것은 삼별초 항쟁의 역사적 성격을 뚜렷이 보여주는 것이다.
삼별초의 항쟁은 원에대한 고려의 예속화를 묵인하고 종속적(從屬的) 위치를 감수하면서도 자기네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왕 및 그 일파의 행동에 반발(反撥), 항거(抗拒)한 병사들의 폭동(暴動)이며 이것이 당시의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었고 비록 실패에 그쳤지만 연합군의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상대로 3년간이나 싸우고 버틸 수 있었다는 점에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삼별초의 항쟁은 몽고와 강화한 뒤 민란(民亂)의로 인해 민의 성숙한 사회의식이 고조된 상황에서 왕실, 친몽고파 귀족들과 대립되는 친무인파와 기존의 반외세반정부의 기치를 든 일반민중의 참여로 일어난 13세기 후반의 가장 방대한 항전이었고, 삼별초의 항쟁의 좌절은 민의 역동적인 사회변화 의식을 저하시키고 이로 인해 14세기 민의 움직임에도 깊은 영향 을 주었다. 삼별초의 항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시각에서 반외세(反外勢 ).몽고투쟁(蒙古鬪爭0의 긍정적 측면과 무신정권의 기반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부정적 측면에 대해서는 좀 더 다양한 역사적 사실과 해석을 가지고 냉철하게 판단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삼별초의 항전은 몽고의 반침략투쟁(反侵掠鬪爭)으로서 나라를 예속화(隸屬化)하려는 정부의 태도에 대하여 반대하는 반몽적(反蒙的) 성격으로서, 또 몽고에 투쟁하여 자주성을 보여주는 민중의 저항정신을 대변한 민중적(民衆的) 성격으로서의 의의(意義)가 크다.
- 참 고 문 헌 -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윤용혁/ 일지사/ 2000
-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 연구2/ 윤용혁/ 일지사/ 2000
- 무인시대와 삼별초/ 유현종/ 대산/ 2003
-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국사편찬위원회/ 1977
- 고려무인 이야기/ 이승환/ 푸른역사/ 2001
- 삼별초/ 김정한/ 시와사회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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