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생명의 형이상학 -생명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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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생명의 형이상학적 문제

2. 생명의 형이상학적 탐구 방법

3. 대립된 생명의 형이상학

4. 존재의 비개념성

5. 맺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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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과 물질은 어린애들도 쉽게 가려낸다. 그러나 막상 생물의 본질이 그 밖의 존재들의 본질과 어떻게 다르냐를 결정하기란 생물학자나 철학자에게도 그리 쉽지 않다. 본질적 물음은 형이상학적 물음이다. 우리는 지금 생명의 형이상학적 속성을 찾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에 대한 답을 더듬기 전에 먼저 형이상학적 문제의 성격을 밝힐 필요가 있다. 그 다음 기존하는 답들을 서로 비교 대립시키면서 그것들의 타당성을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보다 적절한 새로운 대답을 제안해 보기로 한다.

본문내용

개념과 단절적 관계를 갖고 있지만 그것들은 보다 포괄적 존재 개념인 생물이라는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개념들과는 달리 이 두 개의 개념들을 포괄할 수 있는 더 포괄적 현상적 존재 개념을 생각해 낼 수 없다. 이 두 개념만은 개념상 서로 단절적 즉 비연속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물이라는 개념과 물질이라는 개념의 단절성은 다른 한편으로는 각기 그런 개념이 지칭하는 구체적 생명이라는 존재 즉 생명체들과 구체적 물질 즉 물체들과의 단절성을 자동적으로 함의하지 않음을 명백히 염두에 두어야 한다. 개념 간에는 절대적 단절이 있지만 존재 간에는 단절이 없다. 생명이라는 개념과 물질이라는 개념은 결코 혼동될 수 없이 서로 다르지만, 어떤 구체적 현상 혹은 존재를 생물이라는 범주 속에 분류해야 하는가 아니면 물질이라는 범주 속에 분류해야 하는가의 결정은 절대적 확신을 갖고서 내릴 수 없다. 즉 구체적인 어떤 것들을 존재적 즉 현상적 차원에서 볼 때 그것들 간의 관계는 단절적이 아니라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파란색과 노란색 혹은 원숭이와 인간은 각자 개념상 분명히 서로 다르지만 구체적으로 각기 그것들이 정확히 어떻게 해서 절대적으로 구별되는가를 결정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과 경험 대상들을 수없이 다양한 개념 속에 분류한다. 그러나 그러한 존재의 분류는 엄밀한 차원에서 볼 때 어디까지나 개념적 분류에 지나지 않지 실제로는 엄격히 분류될 수 없다. 좀 비약적인 논리로 말해서 모든 존재는, 이미 老莊이나 철학적 힌두교나 철학적 불교나 그 밖에도 플로티누스나 스피노자나 니체 등이 알고 있듯이 궁극적으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단절될 수 없는 <단 하나>, 즉 물질이라는 개념이나 생명이라는 개념으로도 서술될 수 없는 <전체로서의 하나>이다. 우리가 언어를 사용해서 개념적으로 표시하는 사물 현상의 다양성은 각기 독립된 다양한 존재들을 지칭하지 않고 다 똑같은 하나 혹은 전체라고 밖에는 달리 부를 수 없는 존재의 다양한 측면들에 불과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한 존재는 다른 존재로 환원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질을 생물로 환원한다거나 생명을 물질로 환원한다는 것은 다같이 처음부터 공허하다. 물질의 본질을 물질적으로 규명하려는 양자 역학은 궁극적으로 물질이 그냥 물질적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음을 물리학적으로 증명했다. 물질과 비물질의 구별이 거의 그 의미를 잃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을 서로 끊어서 생각해서는 안될 고리로서 연결되어 있는 것과 똑 같은 이유와 논리에서 물질, 생물 그리고 인간은 서로 간에 어떠한 선도 명백히 그을 수 없는 연속적 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단 하나>로서의 존재 전체 안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을 어떤 척도에 의해서 그것들간의 우열 계층을 매긴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거나 생물이 광물보다 귀하다는 주장은 아무 근거도 갖지 않는다. 생명의 형이상학적 본질과 그 의미도 위와 같은 포괄적 형이상학의 새로운 비전의 테두리 안에서 파악되어야 한다.
5. 맺는 말
자신이 갖고 있는 지적 능력을 자부해 온 인간이지만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울타리에 갇혀 살아왔다. 그는 세계를 인간중심적 입장에서 의인적으로만 보아왔다. 그러나 첨단 과학의 새로운 발견과 그것들에 대한 철학적 고찰은 위와 같은 세계관이 하나의 환상이었음을 증명한다. 불행히도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무고(無辜)한 것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이제서야 깨닫게 되었다. 과거에 그것은 잘해야 인류의 허영심을 채우는 아편의 기능을 했고 오늘에 와서 그것은 인류의 존속이 걸린 위협으로 나타났다. 오늘 인류가 해결해야 할 가장 결정적 문제인 생태계의 파괴는 인간중심적이며 의인적 세계관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낡고 잘못된 세계관을 생태학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계관으로 대체해야 한다. 즉 모든 현상과 사물의 가치는 인간중심적 입장에 서 있는 의인적 세계관으로부터 생명중심적 입장에 서 있는 의생적 세계관으로 전환해야 한다.
<하나로서의 존재 전체>의 공간과 시간적 한계 즉 그 크기는 어떠한 지적 빛도 도달할 수 없이 방대하다. 우리는 그러한 우주를 생각하며 파스칼 그리고 칸트와 더불어 경탄하며 그 우주의 방대성에 비해 인간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작은 존재라는 사실에 겸허해진다. 지적 능력을 자부하는 인간은 그러한 우주, 아니 존재 일반의 기원이나 이유를 라이프니츠나 하이데거와 더불어 묻지만 대답을 찾지 못한다. 세미텍 종교의 신에 의한 창조설이나 과학자들에 의한 <대폭발>설도 우리의 물음에 대해서는 전혀 만족한 대답이 될 수 없다. 하물며 그런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우주 안의 생물 그리고 인간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 알 수 있으랴. 앞으로 인공 생명, 인공 인간의 제작이 가능하게 된다 해도 위와 같은 궁극적 문제는 영원히 신비에 쌓여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모든 지적 차원을 떠나서 즉 궁극적 문제에 대한 진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존재가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황홀감과 경외심에 빠뜨리게 한다는 사실이다. 방대한 태양계, 더 방대한 은하수, 그리고 그러한 은하수의 거의 무한에 가까운 수는 모든 이유를 초월해서 우리를 압도한다. 그만큼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존재 자체는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귀중하다. 길가의 한 돌조각이나 밭고랑의 한 흙이 이러하다면 하나의 생명은 그것이 아무리 원초적이라 해도 그만큼 더 신비롭고, 그만큼 더 아름답고 그만큼 더 황홀스럽고 그만큼 더 경외심을 자아낸다. 그러나 더 놀랍고 황홀스러운 것은 지금까지 알기로는 그 방대한 우주 안에 오직 우리가 사는 지구 외에는 <생명>의 흔적이나 신호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귀성만으로 생명은 <신성>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귀하고 아름답다. 이런 것을 의식할 때 인류는 물론 생명 자체를 위협하게 된 공해의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결론이 더욱 확고해진다. 인류의 가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에 앞서 생명의 절대적 고귀성을 위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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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09.19
  • 저작시기20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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