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중반 -1930년대초 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운동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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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1920년대 중반 민족주의 좌파의 형성

3. 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 운동

4. 1920년대 중후반 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운동론

5. 1930년대초 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 해소 반대론

6. 결론

본문내용

다. 이 가운데 일부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2)의 입장을 취하기도 하였고, 이종린 같은 경우는 당분간은 범민족적 단체를 재결성하는 것보다 사안이 있을 때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조직하고, 이러한 경험과 훈련을 거쳐 훗날 자타의 주의와 이해를 구별할 수 없는 단계에 가서 범민족적 단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당시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1)의 안재홍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정치투쟁과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견제를 위해 신간회와 같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간의 협동전선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6. 결론
일제하 부르주아민족주의 자파는 그 기원을 한말의 대한매일신보계열 등 신민회 좌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보다 구체적으로는 1920년대 중반 한편으로는 부르주아민족주의운동이 사회주의운동의 도전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민족주의운동 내부에서 자치론과 같은 타협주의적인 주장이 대두함과 함께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특히 자치운동의 대두에 대응하기 위하여 세력을 결집해 나갔고, 이들 세력의 주요 근거지는 조선일보사와 천도교 구파였다.
이들은 자치운동이 1926년경 자치운동이 보다 구체화되는 가운데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사회주의세력과 연대, 민족단일당을 결성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한편 사회주의운동세력도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의 방향전환론'과 민족주의자들과의 일시적 협동론에 의거하여 민족협동전선론을 제창하였다.
여기서 두 세력은 의견의 합치점을 발견할 수 있었고, 1927년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 자치운동을 반대하는 일부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 진보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간의 연합에 의해 민족단일당을 지향하는 민족협동전선으로 결성될 수 있었다. 이로써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비로소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신간회 창립 당시 주도적인 구실을 하여 특히 조선일보 간부들이 본부의 간부직에 대거 진출하였다. 그러나 1927년말부터 송진우같은 자치론자, 수양동우회같은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가 신간회에 침투해들어왔고,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내부에서의 헤게모니 전취론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이에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그들은 자치당이 등장하는 경우, 이에 맞서 신간당을 결성하기로 합의하는 등 대비책 강구에 부심하였다. 이들의 이러한 위기의식이 더욱 심화된 것은 1928년 8월 조선일보사의 간부들이 조선일보의 정간해제를 위하여 일제가 요구한 본부간부직 사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비록 천도교구파가 아직 남아있었지만, 주력이던 조선일보계가 탈락함으로써 이제 신간회본부에서 사실상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이는 일시적으로는 허헌 집행부체제하에 강경투쟁세력이 대두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들 강경투쟁세력도 민중대회사건 등으로 인하여 대부분 구속되었기 때문에 신간회 본부에서 합법·온건노선을 내세운 부르주아민족주의 우파와 일부 사회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합법·온건론자들의 득세가 결과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해소론이 설득력을 얻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의 신간회운동론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은 기본적으로 민족운동가나 계급운동가가 민족해방 이후 어떠한 사회체제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민족해방이 선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데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므로 민족해방의 단계까지는 보조를 같이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서로의 입장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일정 시점까지는 공동전선, 즉 '민족좌익전선'을 펴야한다고 보았다. 또 식민지하 조선에서는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이 대단히 중요하므로 이를 수행하기 위한 '민족단일당'이 필요하다고 보고, 신간회는 아직은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수준에 있다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이같은 '민족단일당의 매개형태'수준에 있는 신간회는 우선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전위분자'의 결집에 노력해야 하며, 노동자·농민 등 기층대중의 조직화와 그를 동원한 대중적 정치투쟁은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신간회의 당면활동은 문자보급운동, 생활개신운동, 민족의식고취운동, 협동조합운동,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획득운동 등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들이 신간회의 활동수준을 그들이 평소 구상해오던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의 운동수준에 맞추어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의 운동방침은 줄곧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의 표적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보다 더 미온적인 노선을 걸은 1930년 이후의 김병로체제는 종국적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해소론에 설득력을 부여하였다. 이미 신간회 내부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조선일보계와 경성지회에서 겨우 영향력을 보존하고 있던 천도교 구파는 김병로노선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신간회 해소론에 대해서도 반대론을 개진하였다.
부르주아민족주의 좌파는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해소론이 기본적으로 노동 농민계급을 본위로 하여 모든 운동을 전개하려는 입장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소부르주아층을 배제하는 노동 농민계급만의 진영편제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라면서 사회주의자들의 노선 전환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해소론에 대하여 그 조급성과 모방성을 비판하고, 당시의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각각의 진영이 전열을 정비하고 신간회의 틀 내에서 다시 '신협동'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즉 '해소'가 아닌 '신협동'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신간회 해소 이후에도 신간회와 같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협동전선의 필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고 그러한 단체를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출처:
http://cuvic.chungnam.ac.kr/~phistory/articles/sasangsa/SHINGAN.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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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2페이지
  • 등록일2002.10.04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5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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